3월 22일 오후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볼리비아 대표팀의 평가전에서 이청용이 골을 성공한 뒤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3월 22일 볼리비아전이 열린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 경기 전 기자실이 시끌시끌했다. ‘4-2-3-1이다, 아니다’로 가벼운 토론이 있었다. 보통 각 언론사는 선발 명단이 나오는 대로 속보 싸움을 벌인다. 예상 포메이션까지 첨부해 경기 전 분위기를 띄운다. 이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마저 출력된 명단을 배포하며 ‘4-2-3-1’이라더니 이후 ‘4-1-3-2’로 정정했다. 기자들은 부랴부랴 기사를 수정해야 했다.
벤투 감독은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힌트를 내놨다. “포메이션이 바뀌더라도 스타일을 유지해야 한다”며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작전 지시를 할 때라곤 하프타임 15분밖에 없는 축구 특성상 경기 중에도 전형을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상황에 맞춘 유연한 대처법은 필수. 벤투 감독은 그러면서도 “기존 색깔로 좋은 경기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남미 강호라 해도 ‘지배하는 축구’를 통해 능동적으로 맞서보겠다는 출사표를 던진 셈이다.
벤투 축구의 바탕은 ‘4-2-3-1’이었다. 조금은 경직된, 그래서 어느 정도는 빤한 축구가 나오곤 했다. 여러 평가전이나 아시안컵에서 드러난 수비형 미드필더진의 운영 성향을 봤을 때 벤투 감독의 운영은 과감하기보다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다득점 경기가 많지 않았다. 후방을 견고히 쌓아 실점을 줄이고, 승리를 챙긴다는 벤투 감독의 실리 전법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4-1-3-2’라는 다소 생소한 전형이었다. 뚜껑을 열자, 흔히 말하는 ‘다이아몬드 4-4-2’에 가까웠다. 포백 기반에 투톱을 최전방 배치한다. 중원은 미드필더를 일렬로 나열하는 대신, 전문 공격형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하나씩 두고 좌우 날개를 붙인다. 양 측면의 미드필더는 넓게 퍼지지 않고 가운데로 좁혀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종종 통용된 ‘4-3-1-2’와 비교해 앞쪽에 무게를 실었다고 보면 된다.
‘지배 축구’ 남미 강호를 흔들다
3월 26일 오후 열린 콜롬비아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골키퍼 조현우가 후반 막판 신들린 선방으로 승리를 지켜냈다. [뉴스1]
다만 이날 승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잘했다고는 해도 검증 단계가 더 남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날 볼리비아 선수들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장거리 비행 뒤 이질적인 환경에 던져진 이들은 몸이 완전히 처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번뜩이긴 했으나, 기본 컨디션이 받쳐주질 않다 보니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도 남미에서는 꽤 까다롭다는 팀인데, 이날만큼은 별 볼 일 없는 축구 후진국 느낌이 날 정도였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부담을 많이 느낀 듯했다.
진짜 시험대는 콜롬비아전이었다. 벤투 감독이 내세운 베스트 11도 콜롬비아전이 훨씬 더 강했다. 무릎 부상으로 이탈한 지동원의 공백은 황의조(감바 오사카)가 메웠다. 1992년생 동갑내기 손흥민과 짝을 이뤘다. 또 터줏대감 격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김영권(감바 오사카)과 정우영(알사드 SC)이 복귀했다. 권창훈(디종 FCO) 대신 이재성(홀슈타인 킬), 나상호(FC 도쿄) 대신 이청용(VfL 보훔)이 선발 출격했으며, 김승규(비셀 고베)에 밀려 골키퍼 두 번째 옵션이 된 조현우(대구 FC)는 도전자로 기회를 얻었다.
일본을 거쳐 방한한 콜롬비아는 확실히 탄탄했다. 한국이 볼리비아를 꺾던 날 콜롬비아는 라다멜 팔카오(AS 모나코)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일본을 1-0으로 눌렀다. 보통 장거리 원정을 뛰는 팀은 시차나 기후에 적응한 두 번째 매치에서 경기력이 더 좋아진다. 콜롬비아 역시 한결 매서워졌다. 팔카오와 하메스 로드리게스(바이에른 뮌헨)까지 가세한 후반은 더했다. 한국 진영을 헤집어놓던 패스는 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템포나 정확도 면에서 볼리비아와 비교가 안 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양 팀 골키퍼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날 데뷔전을 치른 상대 골키퍼 이반 아르볼레다(CA 반필드)의 퍼포먼스는 썩 좋지 못했다. 손흥민과 이재성의 연속 골 모두 정상급 골키퍼였다면 막힐 수도 있었다. 반면 조현우는 후반 막판 상대의 총공세를 육탄 방어해냈다. 빌드업 수준이 살짝 아쉽다는 평가가 있을지라도, 긴 팔과 날렵한 몸매를 극대화한 반사 신경은 2-1 리드를 지켜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슈팅으로 가는 과정이 좋았음에 주목하고 싶다. 벤투호가 내걸어온 ‘지배’라는 키워드도 결국 ‘골’과 ‘승리’라는 궁극적 지향점으로 가는 수단에 불과하다. 후방에서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높여봤자, 상대 진영으로 나아가 슈팅까지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다. 아시안컵에서 이런 문제점을 적잖이 노출한 반면, 콜롬비아라는 강호를 상대로 다시 살아난 데 갈채를 보낼 만했다. 상대 팀이 공을 빼앗으려 달려들었기에 공간이 생겼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 압박을 버티고 전방으로 연결해 마무리까지 짓는 몇몇 장면은 꽤나 설렜다.
아직 다 보여주지도 못한 벤투호 축구
파울루 벤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3월 25일 오후 경기 파주시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에서 콜롬비아와 평가전을 앞두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이제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간 벤투호의 색채가 ‘모험’보다 ‘현상 유지’였다면 지금부터는 3년 뒤 FIFA 카타르월드컵을 향해 감독만의 퍼즐을 차근차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27명이나 불러들인 선수단 규모에서도 그런 의지가 묻어났다. 규정상 23명만 등록이 가능해 벤치에 앉지 못하는 선수가 발생했지만 벤투 감독은 많은 이를 관찰하고자 했다. 다만 이강인(발렌시아 CF)과 백승호(지로나 FC)의 데뷔가 불발된 것은 차치하더라도, 출전조차 못한 선수가 적잖다. 말 그대로 여러 테스트를 거치는 ‘평가전’ 의미가 덜했던 것도 사실이다.
콜롬비아전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체력에 부담을 느낀 선수들이 생겼으나, 추가 교체 없이 그대로 밀고 나가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손흥민도 동조했듯, 이번엔 어린 선수들이 벤투 축구를 훈련으로나마 맛보고 익힌 데 의미를 둬야 했다. 물론 1분도 뛰지 못한 채 아시아와 유럽 간 2만km 비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볼리비아전도, 콜롬비아전도 만원 관중으로 벤투 감독 부임 후 국내 A매치 6경기 모두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물론 여기에 도취해선 안 된다. 새 선수와 형태 등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에 앞서 점검해야 할 포인트가 아직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