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알림1관에서 글로벌 제네시스 브랜드의 론칭을 선언하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2008년 2월 3일 미국 슈퍼볼(프로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 TV 중계방송 중간광고에 사상 최초로 한국 기업 제품이 등장했다. 당시 현대자동차가 새로 출시한 럭셔리 세단 제네시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광고는 벤츠와 BMW, 렉서스에 대놓고 시비를 건다. 이미 자신들이 세계적 명차 브랜드의 견제 대상이 됐음을 스스로 선포했다.
11년 동안 칼을 갈다
당시 현대차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후륜구동형 프리미엄 세단 제네시스를 토대로 별도 고급차 브랜드를 론칭할 예정이었다. 그만큼 품질에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제네시스는 안전성과 안정성, 성능,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그간 현대차가 만든 차는 물론이고, 세계적 명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1세대 제네시스는 현대차가 일찌감치 브랜드화를 염두에 두고 2004년부터 개발한 야심작이었다.하지만 현대차는 1세대 제네시스 차량의 성공적 출시에도 별도 브랜드를 출범하지 않고 연기했다. 이내 닥쳐온 글로벌 금융위기로 고급차 시장이 위축된 데다 내부 기준의 완벽한 충족과 제네시스 브랜드의 복수 라인업 확보가 필수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후 현대차는 절치부심 끝에 2009년 3월 2세대 초대형 플래그십 세단(에쿠스)과 2013년 11월 2세대 제네시스를 개발했다. 2세대 제네시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과 글로벌 명차 수준의 첨단 기술을 인정받고 있으며, 연간 최대 판매량 대비 20% 이상 판매량 증가가 있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2세대 제네시스는 설계 단계부터 현대제철의 초고장력강 기술을 적용한 첫 차로 제네시스의 단단한 골격, 유연한 움직임, 조형적 아름다움에는 현대차그룹 전 계열사의 핵심 기술이 집약됐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2004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1월 4일 근 11년 만에 제네시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재탄생시켰다. 이날 현대차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알림1관에서 정의선 부회장, 양웅철 부회장, 피터 슈라이어 기아자동차 사장을 비롯한 회사 주요 임직원과 국내외 언론인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 세계 고급차 시장을 겨냥한 브랜드인 ‘제네시스’ 론칭을 선언했다.
현대차가 올해 말 제네시스 브랜드를 론칭한 것은 최근 급성장하는 고급차 시장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 브랜드를 육성해 세계 유수 브랜드와 글로벌 고급차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함과 동시에 제네시스 브랜드를 기반으로 현대차 전 브랜드가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것. 즉 ‘제네시스’와 ‘현대’ 브랜드 간 강력한 시너지를 바탕으로 글로벌 브랜드 경쟁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브랜드 명칭을 차량 이름 그대로 ‘제네시스’로 결정한 것은 성능,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진보와 혁신을 지속해 고급차의 ‘신기원’을 열겠다는 의미에서다. 글로벌 고급차 시장에서 제네시스의 인지도가 높다는 점도 고려했다.
현대차가 11월 제네시스 브랜드화를 발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적 측면에서 글로벌 고급차를 넘어섰다는 자신감과 다양화된 제품 라인업 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브랜드 론칭 초기엔 대형 럭셔리 세단인 기존 2세대 제네시스(해외는 G80) 차량과 12월 출시 예정인 초대형 럭셔리 세단 EQ900(G90)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5년 동안 신규 개발 모델 4종을 추가해 총 6종의 라인업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2세대 제네시스.
기술력, 안전성,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
새롭게 개발할 모델은 △중형 럭셔리 세단(G70·2017년 하반기 출시 예정) △대형 럭셔리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고급 스포츠형 쿠페 △중형 럭셔리 SUV 등이다. 신규 차명 체계는 제네시스 브랜드를 상징하는 알파벳 G와 차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숫자가 조합된 방식을 활용한다. EQ900은 사전 계약 첫날인 11월 23일 하루 4323대가 팔려 2009년 2월 에쿠스가 첫날 기록한 1180대보다 4배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글로벌 시장에서 고급차 판매 증가세가 뚜렷한 것도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가 됐다. 실제 글로벌 시장에서 고급차 판매 증가율은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4.8%, 2009년 -12.5%까지 떨어졌고 대중차와 비교해서도 상대적으로 큰 폭의 판매 감소세가 나타났지만,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연평균 판매 증가율(연평균 성장률(CAGR) 기준)은 10.5%를 기록해 대중차 판매 증가율(6.0%)을 크게 상회했다. 도요타그룹과 폴크스바겐그룹의 경우 판매 대수는 대중차 브랜드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판매 대수 증가율은 고급차 브랜드가 높은 편이다.
제네시스 브랜드 출시와 관련해 자동차 전문가 중 일부는 현대차의 독자적 글로벌 브랜드 출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주장은 제네시스 브랜드를 글로벌 시장에 알리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기 때문에 여차하면 현대 브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적 브랜드를 출시하기보다 차라리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와 있는 세계적 고급차 브랜드를 사거나, 그들과 전략적 제휴를 하는 게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사례만 봐도 인도 완성차업체 타타자동차는 2000년대 후반 재규어·랜드로버를, 중국 로컬 완성차업체 지리자동차는 볼보를 인수합병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가 세계 5대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 전 탄생 100주년을 맞은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술 자립’과 국산 고유 브랜드 개발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상자기사 참조). 지난 11년간 독자 브랜드를 준비해온 것도 정 명예회장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기 위해서였다. 기술, 디자인, 안전성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후발주자지만 글로벌 고급차 시장 주도권 경쟁에서 의미 있는 입지를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과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2세대 제네시스의 품질은 전 세계가 공인한 바 있다. 이 차량은 설계 단계부터 현대제철의 초고장력강 기술을 본격 적용한 ‘뼈대부터 다른’ 차로, 5대 기본성능(동력성능, 안전성, 승차감 및 핸들링, 정숙성, 내구성)과 디자인을 글로벌 명차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4년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 스몰오버랩 충돌테스트에서 승용차 최초로 전 항목 만점을 받는 등 안전성에서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섰으며 2014년 캐나다, 2015년 러시아에서 올해의 차로도 선정됐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잔존가치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글로벌 제네시스 브랜드의 최상위 모델로 12월 출시 예정인 EQ900(G90)의 렌더링 이미지. 현대자동차는 2020년까지 총 6종의 라인업을 갖춘다는 계획이다(위).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세계적 자동차 디자이너인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했다.
“현대차, 가장 적합한 전략 선택”
이 밖에 현대차는 미국 시장조사기관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nitial Quality Study·IQS)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체 순위 선두권에 올랐으며, 대중차 부문에서도 1·2위를 다투고 있다. 그만큼 품질 면에서 자신 있다는 얘기다. 한편, 제네시스 브랜드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하고 구체화하고자 세계적 자동차 디자이너인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루크 동커볼케는 대중차 브랜드부터 고급차 브랜드, 슈퍼카 브랜드까지 경험한 디자인 전문가”라며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고, 간결하고 심플하며, 엔지니어링을 이해하는 디자인으로 현대차와 제네시스 두 브랜드의 디자인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이로써 세계 4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와 루크 동커볼케 2명을 보유한 유일한 자동차 회사가 된 셈이다.현대차의 제네시스 브랜드 출시와 관련해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현대차는 국내 고급차 수요가 수입차로 몰리는 상황에서 세계 고급차 브랜드와 경쟁하고 고급 원천기술을 개발, 확보하기 위해선 자체적으로 독자 브랜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고급차 브랜드 론칭과 관련해 현대차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도요타 렉서스처럼 법인을 분리하고 완전한 독자 브랜드로 단번에 가는 길과, 이미 잘 알려진 세계적 고급차 브랜드를 사서 쓰는 방법, 그리고 이번에 론칭한 방식처럼 법인은 분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제네시스 브랜드 차량을 출시하면서 점진적으로 가다 종래에는 독립법인으로 가는 방식이다. 앞에 두 방식의 문제는 현대차 브랜드와의 연결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브랜드 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결국 현대차로선 위험성을 줄이면서 고급차 브랜드를 세계에 안착할 수 있는 세 번째 길, ‘점진적인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대차로선 가장 적합한 전략이었다.”
정의선 부회장은 11월 4일 제네시스 브랜드 론칭을 발표하면서 “현대차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내실을 쌓아 세계 고급차 시장에서 입지를 견고히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 중 일부는 자동차 시장 대세가 친환경차인데 지금 고급차 브랜드를 출시하는 게 과연 현대차에게 유리한가라는 의문도 제기했다. 김현철 교수는 “현재 친환경차를 사는 이는 고급차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친환경차도 고급차가 나올 수밖에 없다. 고급차 소비층은 친환경차 기술에 굉장히 민감한 부류다. 기업 측면에서 보면 친환경차에 적용한 고급 기술을 고급차 브랜드에 적용할 수도 있어 좋다. 그 기술은 대중차인 현대차 브랜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렉서스와 캠리도 친환경 고급차를 생산할 것이다. 현대차가 친환경차 시장에서 세계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라도 자체 고급차 브랜드는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