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중식 기자
박봉규(77·사진) 씨가 펼쳐 보인 훈장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박씨는 이 구절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다 목이 멨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부터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꿈이 드디어 이뤄졌기 때문이다.
‘고 박맹두’는 1943년 1월 박씨가 만 네 살 때 세상을 떠난 형이다. 박씨는 어린 시절부터 형이 독립운동을 하다 고등계 형사들에게 붙들려갔고, 모진 고문 끝에 만 열여섯 나이로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고인이 된 박씨의 부모는 늘 그를 앉혀놓고 “일본놈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세상이 됐으니 형의 원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이순신 장군’을 흠모한 소년
“1966년쯤 형님 친구들이 고향 경남 통영에 형님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말만 무성하다 유야무야됐죠.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독립운동 유공자로 훈·포장을 받는데 우리 형님은 어린 나이에 갖은 고초를 겪고도 그냥 잊힌 채 계시니까…. 속상하고 죄송하고 그랬어요.”또 한 번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형님’에게 건국훈장 수여가 결정된 건 11월 17일 ‘소년 박맹두’가 사망한 지 72년이 지난 뒤다. 근현대사 연구자 박철규 박사(사단법인 대한민국 지식중심 대표)가 일제강점기 형사사건부에서 소년의 항일운동을 증명하는 기록을 찾아낸 게 결정적 증거가 됐다. 이제는 형님을 ‘박맹두 열사’라 부를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또 한 번 눈가가 촉촉해지는 박씨를 바라보며 박 대표는 “아이고, 또 우신다”고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면 무뎌질 법도 한데 지금도 형님 얘기만 나오면 우신다”는 것이다. 이날도 박씨는 그간의 사연을 말하다 때로는 감격에, 때로는 솟구치는 회한에 여러 번 눈물을 쏟았다.
“제가 가진 기억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게 형님과 관련된 거예요. 아주 어릴 때 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들이 들이닥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 안을 막 헤집고 다니던 게 기억나거든요. 그게 형님이 잡혀간 날이라고 합니다.”
박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1941년 말의 일이다. 바로 그날, 열다섯 살 소년 박맹두는 당시 일하던 통영 온망(網·멸치잡이)조합 창고 벽에 먹으로 쓴 ‘조선독립만세’ 벽보를 붙이다 잠복 중이던 형사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박씨가 아버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형사들은 박맹두 열사를 잡아 가둔 뒤 바로 증거를 찾기 위해 집을 덮쳤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 등을 압수하고, 아버지까지 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종종 ‘내가 맹두한테 이순신 장군 얘기를 해줘서 이렇게 됐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우리 고향에서 ‘왜놈’들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형님한테 그 얘기를 늘 들려줬다고 해요. 지금은 우리가 ‘왜놈’들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요.”
멸치잡이조합에서 일하며 일제의 해양자원 수탈을 생생히 목도한 ‘소년 박맹두’에게 그 이야기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님’ 친구들은 훗날 박씨에게 “맹두가 늘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벽보도 여러 차례 붙였다”고 얘기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망에 걸려든 거 같아요. 경찰은 형님을 잡아 가둔 뒤 배후를 대라고 추궁하며 고문했다고 합니다.”
아들의 고초를 박씨 아버지도 생생히 목격했다. 박맹두 열사의 입을 열게 하려고 일본 경찰이 일부러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를 신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가둬 두느냐. 아버지를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맞서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리 형님이 열 살 때 절구를 뒤집었다 바로 세울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경찰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은 거죠. 당시 같이 잡혀갔던 형님 친구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박맹두 열사의 항일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6년 12월 21일자 지면(왼쪽). 박맹두 열사의 동생 박봉규(왼쪽) 씨와 박철규 박사가 독립유공자 인정의 결정적 증거가 된 사료들을 보고 있다.
소년형무소에서 숨진 지 72년
역시 박씨의 이야기다. 지금은 사망한 박맹두 열사의 한 친구는 박씨에게 “당시 경찰서에 같이 끌려갔는데 맹두가 ‘우리 집에는 나 말고도 아들이 더 있으니 나는 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너는 외아들이지 않느냐. 모든 죄를 내게 넘기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966년 박맹두 열사의 동료들이 추념비 건립을 추진한 배경도 여기 있다. ‘동아일보’ 1966년 12월 21일자는 일제강점기 통영에서 10대 소년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소개하며 이 내용을 당시 ‘박 소년’과 가까웠던 친구들이 증언했다고 보도했다.일제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며 ‘모든 죄는 나한테 있다’고 주장한 대가는 혹독했다. 박맹두 열사는 1942년 부산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당시 소년형무소가 있던 인천으로 옮겨졌다. 이후 수형생활을 하다 이듬해 끝내 숨을 거뒀다. 박씨 아버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고문이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박맹두 열사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42년 초 어느 날, 그의 얼굴에서 참혹한 고문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유공자가 되려면 이 모든 기억과 전해 들은 얘기로는 부족했다. 문헌 증거가 필요한데 그걸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 소개로 박철규 대표를 알게 됐어요. 우리 근현대사를 오래 연구하고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도 계셨던 분이라 뭔가 도움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죠.”
마침내 박 대표가 1942년 형사사건부를 찾아냈다. 판결문이 사라져 정확한 항일활동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한 ‘소년 박맹두’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을 살고 형무소에서 사망한 것만은 증명할 수 있게 됐다. 박씨는 이 자료와 박맹두 열사의 제적부, 그리고 66년 동아일보 기사 등을 첨부해 7월 포상을 신청했다. 박 대표는 “일제강점기 최장 3년형은 매우 무거운 벌이다. 열네 살 소년에게 이만한 형량이 선고된 걸 보면 박맹두 열사가 지속적,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했고 일제 수사에도 결코 협조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며 “주요 자료들이 사라져 아쉽지만, 박맹두 열사의 항일정신과 혼만은 기억하고 기렸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