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국립오페라단
‘주간동아’ 1013호에서 소개했던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필자는 3회 공연 중 두 차례 참관했는데, 그중 마지막 날(11월 22일) 공연은 상당히 수준 높고 만족스러운 성공작이었다.
먼저 주역 가수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았다. 타이틀롤을 맡은 유카 라실라이넨은 세계적인 바그너 바리톤답게 노련한 가창과 성격파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첫 등장은 기대만큼 강렬하지 않았으나, 조금은 거칠고 은근히 냉소를 머금은 듯한 음성으로 회의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7년 만에 돌아온 기회에 다시금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는 유령선 선장의 고뇌와 비애를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젠타 역의 마누엘라 울은 빼어난 가창과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바그너 소프라노로서는 드물게 고운 목소리와 아리따운 외모를 지닌 그는 시종 낭랑하고도 풍부한 음성, 섬세하고도 강렬한 표현으로 바그너가 꿈꿨던 ‘구원의 여성상’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보였다. 특히 2막 네덜란드인과 2중창에서 들려준, 따뜻한 모성애마저 느껴지던 노래와 자연스러운 연기가 인상 깊었다.
달란트 역을 맡은 연광철의 묵직한 존재감은 이번 공연의 무게중심이었다. 재작년 같은 무대에 올랐던 ‘파르지팔’에서는 중후한 노기사로 분했다면 이번에는 그와 상반된,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무역선 선장 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냈다. 특히 2막에서 네덜란드인과 젠타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면서 곁들인 코믹한 연기는 그가 과거 모차르트 ‘돈 조반니’의 레포렐로 역으로도 유명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이 밖에 에릭의 애타는 심정을 강렬한 노래에 실어 절절한 호소력으로 표출한 김석철의 존재감도 빛났고, 이석늑이 부른 ‘조타수의 노래’도 충분히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연출을 담당한 스티븐 로리스는 공간적 배경을 노르웨이 해안이 아니라 포경선 내부로 변경해 무척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줬다. 드라마는 포경선 갑판과 선실을 오르내리며 진행됐고, 무대 뒤쪽에는 개폐식 문을 설치해 상황에 따라 바다를 향해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 사이 전환을 적절히 이뤄냈다.
남성 합창단은 고래잡이 어부들로, 여성 합창단은 고래 고기를 가공하는 여공들로 분했는데, 특히 2막 ‘물레질 합창’ 장면을 고기 분쇄기 돌리는 장면으로 바꾼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또 무대 전면과 후면에 설치된 막에 바다 풍경을 동영상으로 투사하면서 갈매기를 ‘구원의 모티프’로 활용한 부분, 그리고 네덜란드인의 ‘유령신부’들을 등장시킨 부분도 주목할 만한 연출상의 포인트였다. 반면 작품 하이라이트인 3막 ‘노르웨이 선원들과 유령선 선원들의 합창 대결’ 장면에서 스피커를 통해 나온 ‘유령선 선원들의 합창’ 소리가 충분히 부각되지 못하는 바람에 극적 효과가 떨어진 대목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공연은 재작년 ‘파르지팔’에 이어 국내 오페라단이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해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개가로 기록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첫날 공연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력, 앙상블의 완성도가 미흡했던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공연은 국내 오페라단이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해 성공을 거둔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국립오페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