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블랙리스트 그 후

여전히 네포티즘에 멍드는 문화예술계

노무현 정부가 연 ‘판도라의 상자’ 문재인 정부가 닫아야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8-10-14 08: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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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반발해 연극인 이양구 연극 연출가(왼쪽)와 김주현 음악가가 10월 10일 광화문광장에서 1인 항의시위에 나선 모습. 이들은 징계 수준이 경미해 사실상 그 대상이 0명이라 주장한다. [대학로X포럼 페이스북]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반발해 연극인 이양구 연극 연출가(왼쪽)와 김주현 음악가가 10월 10일 광화문광장에서 1인 항의시위에 나선 모습. 이들은 징계 수준이 경미해 사실상 그 대상이 0명이라 주장한다. [대학로X포럼 페이스북]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를 100대 국정과제 1호인 적폐청산의 1번 과제로 발표했다. 하지만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이 문제를 들고 나왔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다시 거리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6월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와 산하 공기관 소속 131명을 징계하라는 권고안을 냈다. 하지만 9월 발표된 문체부의 처벌 수위는 수사 의뢰 24명을 포함해 68명 징계에 그쳤다. 그중 일부는 권고안 전 이미 징계를 받은 인물이고 대다수는 징계 수위가 가벼운 ‘주의’에 머물렀다. 

    그러자 ‘솜방망이 처분’ ‘셀프 면제’라는 반발이 문화예술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며 분노한 예술인들이 문체부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추석 연휴부터 청와대 앞에서 1위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연극인들은 블랙리스트 피해 단체 및 개인의 연명 서명을 받아 다음 주엔 기자회견도 진행할 예정이다.

    블랙리스트 저격수의 변심

    10월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10월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문화예술계의 충격과 반발에는 도종환 문체부 장관에 대한 진한 배신감도 작용했다. 시인 출신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도 장관은 야당 의원 시절부터 이 문제의 이슈화에 앞장서왔다. 그런데 막상 주무 부처 장관이 되자 ‘제 식구 감싸기’를 위해 사태 해결의 첫 단추가 될 ‘책임자 처벌’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끝내려 한다는 것이다. 

    장관의 변신 이유가 과연 거기에만 있을까. 이에 대한 문체부의 해명 가운데 ‘하위직 실무자들(사무관급 이하) 22명에게 징계 처분을 하지 않은 것은 권한 없는 자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점을 고려한 것’이란 대목을 눈여겨보고 시선을 국공립문화예술단체 기관장 인사로 돌려보자. 



    블랙리스트 문제를 1번 과제로 들고 나온 정부라면 최소한 문화예술계 분야에서만큼은 소위 코드인사라는 것을 자제할 법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 임명되거나 임명을 앞둔 기관장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는 뚜렷하다. 

    지난해 9월 안호상 전 국립중앙극장장의 사표 수리 후 1년 넘게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운 김철호 신임 국립중앙극장장은 진보성향 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출신이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3년 국립국악원장에 취임해 한 번 연임한 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잔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국립중앙극장장 인사가 1년 넘게 미뤄졌던 것은 현 정부가 사실상 내정했던 인사가 ‘미투운동’으로 갑자기 낙마한 후 3급 이상 고위 공무원이면 거쳐야 하는 역량평가시험을 통과할 만한 코드인사를 찾지 못해서란 후문이 들려온다. 과거 그에 해당하는 기관장을 역임한 경우 시험을 면제한다는 조항에 맞는 친노(친노무현) 계열의 김 극장장을 대타로 삼았다는 것이다. 

    조만간 발표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위원장과 국립현대미술관장 인사에도 ‘캠코더 인사’가 재현되리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캠코더 인사는 ‘문재인 대선캠프 출신’ ‘코드인사’ ‘더불어민주당 출신’을 뜻한다.

    국립중앙극장장, 예술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장…

    한 해 2000억 원 예산을 예술인에게 지원하는 예술위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예술가에 대한 지원 배제 실무기관으로 지목됐던 기관이다. 따라서 예술위원장으로는 대대적 혁신이 요구되는 이 기관을 이끌 인물로 문학비평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임명됐다.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 문학인 5·9 선언’에 이름을 올렸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문인이라 반발이 적었다. 하지만 황 전 위원장이 임명 3개월 만인 올해 2월 암 재발 사실을 알고 자진 사퇴하고 8월 별세한 뒤 해당 위원장 자리는 8개월째 공석이다. 

    현재 최종 후보가 3~4명으로 압축됐다고 하는데, 배우 출신인 최종원 씨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최씨는 현 여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정감사 기간 룸살롱 접대를 받아 검찰로부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그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으며, 보수정권 시절 잇단 막말로 여러 차례 구설에도 올랐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도종환 장관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문화예술정책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이렇게 정치색이 짙은 인사가 예술위원장을 맡으면 지원금의 좌편향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게다가 최씨는 블랙리스트가 시행될 때 침묵하다 뒤늦게 비판에 나선다는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성명으로 민주당 상임공동위원장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임정희 문화연대 공동대표와 박종관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도 거론된다. 임씨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와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을 맡은 시각예술가이고, 박씨는 예술위 초대 위원, 예술공장 두레 이사,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지낸 공연 전문가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진보성향의 문화연대와 민예총 출신이라는 점에서 캠코더 인사 논란을 비켜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의 경우 문체부 산하 예술 단체장 가운데 첫 외국인 수장으로 올해 12월 임기를 마치는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의 후임으로 진보성향 미술가들의 이름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을 지낸 이영욱 전주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 이용우 전 상하이 히말라야미술관장 등이다. 이 가운데 현 정부와 인맥이 가까운 이영욱 교수와 김홍희 이사장이 유력 주자로 거명되다 최근에는 다른 카드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스페인 출신 서양화가인 마리 관장과 차별화를 위해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임옥상 씨를 깜짝 발탁할 수 있다는 것. 

    문화예술계 자체 논리보다 청와대, 여당 정치권과 가까운 인사가 문화예술계 기관장을 잇달아 꿰차면서 좌우만 바뀌었을 뿐 전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는 통계수치로도 뒷받침된다.

    문체부 산하 9개 문화예술기관 임원의 50.6%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김재원 의원은 국감자료를 토대로 문체부 산하 33개 기관 임원 449명 임원을 전수 조사한 결과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새로 임명된 임원 249명 중 78명(31.3%)이 캠코더 인사였다고 밝혔다. 문화예술기관으로만 좁혔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9개 기관에 새로 임명된 임원 79명 중 40명(50.6%)이 캠코더 인사 출신으로 조사됐다(그래프 참조). 이는 바른미래당이 최근 340개 정부 공공기관 인사 현황을 분석해 나온 캠코더 인사 비율(22%·1651명 중 365명)을 2배 이상 웃도는 것이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양현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 김도일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같은 기관장도 여기에 포함된다. 오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를 비판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그후’의 주연(主演)을 맡았다. 양 원장은 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화예술정책위원회 위원이었고, 김 대표는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이었다. 

    문체부 산하 기관은 아니지만 최근 EBS 이사장에 임명된 소설가 유시춘 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고 최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은 유시민 씨의 친누나다. 문화예술계 인사이긴 하지만 방송과 별 인연 없는 인물이 공영방송 이사장이 된 점을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다. 

    문제는 이런 코드인사가 해당 기관이나 문체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와 교감 아래 진행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데 있다. 이 소문이 맞는다면 문화예술계 인사에 여전히 정치논리가 개입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블랙리스트 문제를 그처럼 통렬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집권하고 나서는 대통령과 안면이 있거나 친분이 있고 코드가 맞는 인물들로 기관장과 임원 자리를 채우는 것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는 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서 시작된 악순환 끊어야

    왼쪽부터 이창동 영화감독,  배우 유인촌, 차은택 공연연출가.

    왼쪽부터 이창동 영화감독, 배우 유인촌, 차은택 공연연출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 인사가 이권과 네포티즘(정실주의)이 결탁한 참사였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도라의 상자를 처음 연 것이 노무현 정부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인사는 보수와 진보로 나뉠지언정 그 판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을 관련 기관장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자신이 직접 알고 친한 예술가를 임명하는 무리수를 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창동 영화감독의 문화관광부 장관 기용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서 유인촌 문체부 장관 기용을 낳았고 급기야 박근혜 정부 시절 차은택의 ‘문화계 황태자’ 등극 사태로 귀결됐다. 

    이번 정부 들어 예술위원장 후보에 2번이나 지원해 고배를 마신 심재찬 전 대구문화재단 대표의 말이다. 

    “블랙리스트 문제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예술위 초대 사무처장을 한 제가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두 차례나 지원했습니다. 처음엔 최종 후보까지 올려놓더니 두 번째는 아예 서류심사에서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아이쿠, 나오란 소리도 없는데 눈치 없이 두 번이나 나선 내가 바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부의 예술 관련 인사를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아요. 해당 분야 전문가를 놔두고 왜 자꾸 엉뚱한 사람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왜 코드인사가 없어지지 않고 횡행하는 것일까. 국립중앙극장장을 지낸 안호상 홍익대 교수의 말이다. 

    “해외에서는 예술기관장을 함부로 바꾸지 않습니다. 한 번 임명하면 보통 3~4년인 첫 임기의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연임할지 교체할지를 결정합니다. 연임이 결정되면 보통 10~15년 임기를 보장해줍니다. 예술기관마다 미션을 뚜렷이 설정하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그 미션에 부응하는 인재를 자율적으로 선임하고 이사회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만 정부가 개입합니다. 한국 사회에선 정치인이 문화예술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독자성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아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누군가 끊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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