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핵비확산 주제 국제회의에 참석한 최선희 당시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 [뉴스1]
01 미국 협상팀의 준비 부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12일(현지시각)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전격 경질했다. 후임으로 마이클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명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미국 협상팀을 진두지휘할 장수를 교체한 것이다.틸러슨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언행을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우산 안에서 봉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비둘기파로 분류된다. 반면 육군 장교 출신인 폼페이오는 공화당 의원 시절부터 대외정책에 대한 매파로 분류돼왔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CIA 국장에 임명된 후 대북제재를 위한 정보 수집과 공작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과연 그가 협상팀을 이끌 적역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게다가 미 국무부 내 북한 전문가로 분류되는 인사가 대거 물러난 상황이다. 주한 미국대사로 유력하게 거명되던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가 트럼프 대통령과 인식 차이로 낙마한 데 이어 조셉 윤 전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까지 조기 은퇴했다. 게다가 과거 제네바 북핵 협상을 이끌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대사나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도 민주당 인사로 분류돼 협상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형편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제재에만 주력해온 탓에 막상 협상에 나설 전문인력이 부족한 상태”라며 “협상팀의 준비 부족으로 정상회담 자체가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과거 북·미 협상은 국무부 주도 아래 이뤄졌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백악관 주도로 결정되고 추진된다는 점에서 백악관이 직접 협상을 진두지휘할 수도 있다”고 봤다.
02 베일에 가린 북한 협상 전략
이에 반해 북한은 수십 년간 북·미 협상을 전담해온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다. 1994년 제네바합의 때 북한 협상팀을 이끌던 강석주 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는 2016년 5월 식도암으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당시 강석주와 콤비를 이룬 김계관(75)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 건재하다.여기에 최근 외무성 부상으로 승진한 최선희 외무성 북아메리카국 국장(북미국장)의 역할도 주목받고 있다. 최선희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의 통역을 전담하다 2010년 10월쯤 북미국 부국장으로 승진한 후 김정은 시대 대미협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2016년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한성렬(64) 후임으로 북미국장이 된 그는 1년여 만인 올해 2월 외무성 부상 자리에 올라 고속승진을 거듭하고 있다. 북·미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지난해 5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석방 문제가 논의될 때 당시 조셉 윤 대북정책특별대표의 파트너를 맡았던 인물도 최선희였다.
북한 전문가들은 미국 측 협상대표로 폼페이오 신임 국무장관이 나선다면 북한에선 리수용(83)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국제담당)이나 리용호(62) 외무상이 나서겠지만 실무협상은 김계관과 최선희가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이번 정상회담에 나서는 북한의 협상 전략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실장은 “북·미 간 직접 접촉이 아니라 남한의 중재로 협상이 이뤄지다 보니 북한이 직접 미국에 이야기한 내용이 없다”며 “북한이 어떤 복심을 갖고 협상에 나설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상황이라 자칫 북한의 페이스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03 중국 변수
구갑우 교수는 “이번 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중국 측의 몽니가 가장 우려된다”고 말했다. 중국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발표된 공동성명 4항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과 북이 현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직접 관련된 정상들이 만나 협력한다는 내용의 이 조항에서 해당 정상들을 ‘3자 또는 4자’로 표현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여기서 3자는 북한이 생각하는 남북과 미국을 말하고, 4자는 남한이 생각하는 남북과 미·중을 아우르는 표현이었다.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경우 당사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정전협정 체결 주체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었다. 북한은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과 일대일 평화협정 체결을 원한다. 하지만 남한은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중국을 포함시키고 남한이 들어가는 ‘4자 당사자’ 논리를 제기해왔다. 그런데 2007년 정상회담에서 3자 구도가 처음으로 언급되자 반발한 것이다.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은 미국 측 요구에 따라 저강도 대북 경제압박에 동참해왔다. 그래서 혈맹을 자처하던 북·중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다. 그런 가운데 북·미 정상회담이 갑작스럽게 결정됨에 따라 북한에 대한 입지가 좁아져 당황하고 있다. 그런데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까지 배제된다면 반발할 공산이 크다.
또 핵무기 폐기와 관련해선 북한의 핵무기 또는 폐기된 핵물질을 해외로 반출해야 한다. 핵물질을 북한에 계속 놔두면 다시 핵무기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핵물질을 반출할 제3국으로 유력한 후보는 이미 핵을 보유한 중국과 러시아다. 북한은 껄끄러운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를 선호할 수도 있다. 미국은 핵 위협 제거에 대한 공동책임을 중국에게 지우기 위해서라도 중국으로 반출을 요구할 개연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역할론 공세에 나설지도 모른다.
04 일본 변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행정부 역시 갑작스러운 북·미 정상회담 발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간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 없다”며 신중·경계론을 펼쳐왔는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합의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굴러가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총리실 관료가 “현기증이 난다”는 발언까지 했을 정도.이런 당혹감은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가 진전되는데 일본만 ‘왕따’를 당하는 ‘저팬 스키핑’에 대한 우려와 결합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4월 미국으로 건너가 트럼프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한 것을 3월 9일 북·미 정상회담 발표 직후 공개한 것도 그런 초조감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이어 10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을 경우 초기 비용 3억 엔(약 30억1000만 원)을 일본 정부가 부담하겠다는 발표를 신속하게 내놓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이 때문에 아베 총리가 4월 방미해 북·미 정상회담을 훼방 놓으려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특히 일본 국내 정치에서 파급력이 큰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을 북·미 정상회담 의제로 밀어 넣어 고춧가루를 뿌리려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일본 자민당 정권은 납치자 문제로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깜짝 방북카드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시도를 동시에 전개해왔다. 2002년과 2004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깜짝 방북을 통한 북·일 정상회담이 대표적이다. 아베 총리도 당시 관방 부장관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해 방북했다.
게다가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다시 하락세로 돌아선 상황이다. 지난해 그의 지지율을 20%대까지 떨어뜨렸던 사학 스캔들이 다시 터진 것이다. 일본 재무성이 아베 총리 부부가 연루된 ‘모리토모 학원’ 부당 지원 문제를 무마하려고 공문서 14건을 조작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여론이 악화됐다.
지난해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조성된 안보위기론에 힘입어 위기를 벗어났다. 일본판 북풍(北風)의 혜택을 누린 셈이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다. 위기 탈출을 위해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방북카드를 만지작거릴 만하다. 이에 북·미 정상회담 전 북·일 정상회담이 깜짝쇼처럼 펼쳐질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05 정상회담 장소 선정의 외교적 함의
북·미 정상회담이 발표되면서 4월 말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기로 한 남북정상회담의 의미가 가려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어떤 합의를 끌어내느냐에 따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뿐 아니라 장소도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북특사단의 합의 6개 조 가운데 3개가 비핵화와 관련된 만큼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합의가 어떻게 도출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남북정상회담에서 진전된 내용이 없는 상황이라면 북·미 정상회담 장소 역시 판문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판문점에서 회담을 하면 정상 간 만남 횟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무협상이 상을 다 차려놓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남북정상회담에서 진전된 성과가 도출된다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미국 워싱턴 내지 뉴욕으로 날아갈 개연성도 있다. 정성장 실장은 “젊고 담대한 김정은 입장에선 정상회담 장소로 백악관을 선호할 수도 있다”고 말했고, 구갑우 교수는 “김정은이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을 우선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성과가 그 중간 단계에 머물 경우 스웨덴이나 스위스 같은 제3국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 스웨덴은 서방국가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북한에 상주대표부를 두고 있다. 스위스는 인도적 대북지원을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서방국가다. 마침 리용호 외무상이 15일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스웨덴으로 출발했다. 스웨덴 외교부는 리 외무상이 스톡홀름에서 마르고트 발스트림 외교부 장관과 이틀간 회담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미외교 실무자인 최강일 북미 부국장이 리 외무상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 위장용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정상회담 장소 선정을 둘러싼 외교를 ‘토포스(topos·장소) 외교’라고 부른다면 정상회담에서 단박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지,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풀어갈지는 ‘크로노스(kronos·시간) 외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스캔들에 11월 중간선거까지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자신과 공화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재선 성공의 교두보까지 마련할 ‘한 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북핵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를 포괄적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속도전으로 처리하려 들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2000년 10월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 공동 코뮈니케(성명)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당시 김정일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사이에 채택된 이 코뮈니케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과 북·미 관계의 진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를 담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행정부 이후에도 양자 간 합의가 유효하게 지켜질 것인지를 확실히 검증받기 위해 장기전을 펼칠 가능성도 있다고 구갑우 교수는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