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0

2008.08.26

부활하는 소련 제국과 붉은 군대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8-08-20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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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하는 소련 제국과 붉은 군대

    ‘붉은 10월’

    1980년대에는 스파이 영화 만들기가 요즘보다 쉬웠을 것이다. 왜? 끊임없이 스파이를 보내는 ‘악의 제국’이 정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악의 제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옛 소련이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등의 007 시리즈 말고도 많은 영화가 소련에서 온 첩보원과의 대결을 그렸다. 스파이물에 관한 한 옛 소련은 마르지 않는 소재의 샘이었다.

    ‘악의 제국’의 위용은 영화 ‘붉은 10월’의 거대한 핵잠수함처럼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악당들은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잠수함처럼 어두운 심연 혹은 장벽 너머에서 서방 세계의 안전을 위협했다. 이 영화를 끌고 나갔던 것은 폐쇄된 잠수함 내부라는 공간이 자아내는 긴장과 함장의 망명 의사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미국 본토가 핵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상황이 빚어내는 공포였다. 그 공포는 냉전시절 소련에 대한 서방의 두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진 1990년은 실제로는 냉전적 대결의 긴장이 급속히 사라져가던 때였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1년 전에 나온 이 영화는 그래서 오히려 냉전의 황혼녘에 부르는 고별사처럼 들렸다. 그건 또한 소련의 붉은 군대와의 고별이기도 했다. 붉은 10월 호가 상징하는 붉은 군대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와해되고 위축됐다. 붉은 군대야말로 소련의 해체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은 집단이었다.

    그 후 붉은 군대는 어디로 갔는가. 일부는 적의 심장부인 뉴욕과 런던의 공연장에 가 있다. 스탈린이 가장 아꼈다는 붉은 군대 합창단(레드아미 코러스)은 서방의 도시들에서 과거 적성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붉은 10월 호가 출정할 때 군인들이 부르는 합창의 주인공이 바로 레드아미 코러스였다. 한때의 출정가를 서방 관객들은 이제 긴장이나 두려움 없이 감상하고 있다.

    일부는 관광상품으로 변신했다.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를 찾은 서구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코스 중 하나는 ‘미그기 탑승 코스’였다. 서방의 군사첩보당국이 필사적으로 알아내려 했던 소련 공군력의 상징인 미그기를 돈만 내면 몰아볼 수 있었다. 특히 서구의 은퇴 전투기 조종사들이 여기에 우르르 몰렸다. 관광상품이 된 붉은 군대. 그건 말하자면 ‘군대이지만 진짜 군대가 아닌 군대’였다.



    그러나 소련 제국이 부활하는 듯한 최근 상황은 붉은 군대도 되살려내고 있다. 그루지야에 대한 군사 공격은 부활하는 러시아 제국, 붉은 군대를 보여준다. 석유와 가스로 축적한 엄청난 경제력이 부활의 1라운드였다면, 붉은 군대의 위용을 되찾으려는 것은 2라운드다. 붉은 군대의 합창을 이제 느긋하게 들을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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