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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미스터리를 넘어 04

구원파 붕괴는…없다

종교이자 경제생활공동체로 공고한 조직…포스트 유병언은 권윤자 또는 유혁기

  • 한상진 ‘신동아’ 기자 greenfish@donga.com

구원파 붕괴는…없다

구원파 붕괴는…없다

검찰이 경기 안성시 금수원에 진입한 6월 11일 오후 금수원 앞에 모인 구원파 신도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 앞으로 ‘십만성도 다 잡아가도 유병언은 내가 지킨다!’는 현수막 글이 보인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에 있는 것으로 여론이 조성되던 4월 말, 구원파의 총본산인 경기 안성시 금수원 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렸다.

‘십만성도 다 잡아가도 유병언은 내가 지킨다!’

이 현수막은 구원파 내에서 유 전 회장이 갖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 전 회장은 구원파 신도 중 한 사람일 뿐”이라던 구원파의 주장도 무색해졌다. 유 전 회장이 구원파 교주이자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구원파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구원파 창시자는 유 전 회장 장인인 고(故) 권신찬 목사다. 권 전 목사가 구원파 교회를 운영하던 1960년대 구원파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구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그저 그런 소종파에 불과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사위인 유 전 회장이 구원파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성격이 달라졌다.

‘종교의 기업화’ 대를 이어 봉사

권 전 목사는 유 전 회장을 구원파 지도자로 세우면서 그를 사실상 신격화하는 작업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권 전 목사는 “우리 모임의 지도자는 유병언, 그는 하나님이 기른 몸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교했다. 또한 “유병언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마라. 하나님만이 유병언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 전 목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구원파 신도들은 그의 말에 복종했다.



유 전 회장은 구원파를 장악한 직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종교의 기업화’를 선언한다. 종교와 경제 생활이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참다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구원파 신도들은 유 전 회장의 지시에 따라 개발비 명목의 헌금을 모았고, 이 돈은 76년 삼우트레이딩을 시작으로 수많은 기업을 인수하고 설립하는 데 사용됐다. 86년 한강유람선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 전 회장은 사업가로 꽃을 피웠다.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한 뒤부터 그는 스스로 정신지도자인 ‘목사’를 내려놓고 경제지도자인 ‘사장’으로 변신했다.

구원파 붕괴는…없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강연 모습. 유 전 회장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믿고 따라야 할 존재로 인식돼왔다.

구원파 신도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최근까지도 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하거나 설립하고 부동산을 매입했다. 유 전 회장과 구원파의 최종 목표는 생산, 노동, 분배가 한 번에 이뤄지는 경제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 영농조합, 60개가 넘는 기업이 이렇게 생겨났다. 이런 작업은 1980년대 후반부터 유 전 회장을 맹신해온 신도모임 ‘통용파’가 주도했다. 현재 유 전 회장 일가의 비리 의혹으로 구속된 측근들은 모두 통용파 출신이다.

기업과 종교가 합쳐진 이런 기형적 형태의 종교조직은 천부교(교주 박태선)의 신앙촌, 통일교(교주 문선명)의 통일그룹과도 비슷한 형태다. 30년 이상 구원파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구원파 신도들은 대를 이어 구원파에 봉사하는 삶을 꿈꾼다. 구원파 신도인 한 유명 대학 교수는 미국 유수 대학을 졸업한 자신의 아들이 금수원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일반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업과 종교를 동일시한 구원파의 논리는 1983년 1월 당시 유 전 회장의 최측근이던 송재화 씨의 강연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91년 ‘주간여성’을 통해 공개된 녹음파일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요즘 항간에서 뭐라 그러느냐면, 돈이 신앙과 무슨 상관 있느냐 그러거든요. 하나님이 돈을 원하시겠느냐. 물론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돈이 우상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우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결국 내가 물질을 옮겨보지 않으면 돈의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돈의 종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자유함을 누리고, 거기서 믿음이 어떤 것이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돈이라는 걸 매개체로 시작했던 거예요. 아무리 뭐니 해도 저는 돈인 것 같아요.”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파 내에서 유 전 회장은 교주 위치에 있다. 그러나 여타 종파의 교주(메시아)와는 다소 개념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모임(구원파)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구원파가 나아갈 길,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면서 믿고 따라야 하는 존재로 인식돼왔다. 최근까지 구원파에 몸담았던 한 신도는 이렇게 말했다.

구원파 붕괴는…없다
관련 기업 ‘모임의 재산’으로 인식

“오래전부터 유 전 회장은 유기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기농 제품을 모임(구원파)에서 직접 생산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 설교에 따라 신도들은 경쟁적으로 돈을 모았고 땅을 사들이려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게 해서 영농조합이 만들어지면 신도들은 ‘우리 모임의 재산’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1987년 오대양사건이 나기 전 유 전 회장은 신도들에게 스쿠알렌을 먹으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스쿠알렌은 세모그룹이 만들어 파는 대표적인 상품이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신도들은 스쿠알렌을 경쟁적으로 사 먹었다. 상당수 구원파 여성 신도는 가정을 나와 스쿠알렌 판매원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구원파가 아닌 판매원을 ‘이방인’이라 부르며 배타적인 판매조직을 형성해나갔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구원파 신도는 “가정주부들이 스쿠알렌을 판다며 화장하고 집에서 나왔다. 모임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경쟁적으로 스쿠알렌을 팔았다. 특히 사회지도층 인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판촉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가정이 파괴됐다. 판매원 사이에서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구원파 관련 기업과 부동산을 ‘모임의 재산’으로 인식해온 구원파 신도들은 관련 기업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돈과 인력을 동원해 기업 회생에 매달렸다. 사채를 끌어들이다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한 구원파 신도는 “유씨가 지시하는 걸 하지 않으면 모임(구원파)에서 왕따가 됐다”고 말했다.

2000년 초부터 유 전 회장은 설교와 각종 강연을 통해 태권도, 유도를 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후 전국 구원파 교회와 금수원 강당에는 수련을 위한 매트리스가 깔렸다. 주말마다 금수원과 교회에 모여 유도와 태권도에 매진했다. 신도들은 그것이 건강을 지키고 조직을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구원파 신자인 탤런트 전양자 씨는 유도홍보대사를 맡기도 했다.

6월 검찰은 행방이 묘연하던 유 전 회장을 압박한다며 친형 유병일 씨, 부인 권윤자 씨 등을 구속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때는 이미 유씨가 사망한 뒤였다. 유 전 회장이 사망하지 않았다 해도 형이나 부인의 구속이 유 전 회장에게 압박 카드가 되지는 못했으리라는 게 구원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모임 지도자로 사실상 신격화된 그에게 부모형제라는 혈연관계는 유 전 회장을 움직이는 변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2008년쯤까지 구원파 사무국을 책임지던 형 병일 씨는 유 전 회장의 뜻을 어겼다는 이유로 모임에서 배척당했고, 부인 권씨도 구원파 내 어머니회 정도에서만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일 씨를 내치면서 유 전 회장은 측근들에게 “비록 형이지만 이 모임에서는 내가 어른”이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2008년 유혁기 지도자 부상

구원파 붕괴는…없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청해진해운 계열사 ‘다판다’ 사무실.

권 전 목사에게 모임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은 유 전 회장은 1999년쯤 둘째아들 혁기 씨를 후계자로 낙점,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구원파 본부인 금수원에서 설교를 하게 해 사실상 후계구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부 신도는 혁기 씨의 후계세습에 반발해 모임을 떠나기도 했다. 한 구원파 신도는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유 전 회장이 모임 지도자로 군림했지만, 실질적인 힘은 혁기 씨가 행사해왔다”고 증언했다.

후계 문제 말고도 유 전 회장에 대해선 조직 내에서 이런저런 비판이 많았다고 구원파 신도들은 전한다. 거짓말도 많이 하고 필요 이상으로 씀씀이도 컸으며, 외국 제품을 과도하게 좋아한다는 등의 비판이 내부에서 일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40년 이상 구원파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장악했다. 그 비결은 유 전 회장 측근 송씨의 1983년 강연 내용에 잘 언급돼 있다.

“사장님(유병언) 생활을 보면 (중략) 가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직 많은 성도가 쓸 것을 공급하기 위해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분 하는 일에 100% 뒤에서 미는 것이 (중략) 그분을 통해서 역사해왔던 어떤 일, 그걸 볼 때 분명 성령이 함께 하셨구나 이걸 믿는 거죠. (중략) 사장님이 지혜자란 것을 알게 되면 사장님 하시는 일에 반대가 없어지고 그분 하는 일에 맹목적인, 어떤 일이든 순종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세월호 사고와 검찰 수사를 거치면서 구원파는 사실상 상당 부분 와해됐다. 관련 기업이 줄줄이 부도를 맞고 있고, 조직을 떠난 신도도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의 사망과는 관계없이 구원파는 여전히 건재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심지어 일부 핵심 신도들은 여전히 유 전 회장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유 전 회장 사후 구원파는 어떻게 될까.

취재 중 만난 복수의 전·현 구원파 관계자들은 유 전 회장 사후 부인 권씨, 둘째아들 혁기 씨를 중심으로 구원파가 빠르게 재편될 것으로 전망했다. 단순 종교조직이 아닌 경제생활공동체이기 때문에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만약 모임과 모임에서 운영하는 기업들이 붕괴할 경우 사실상 생존 터전을 잃게 되는 구원파 신도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 특히 부인 권씨의 경우 구원파를 창립한 권 전 목사의 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향후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되리란 시각도 있다.

한 구원파 신자는 “구원파에 대한 수사는 부당하다. 우리는 이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더 공고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원파는 1991년 오대양사건 당시 자신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유 전 회장의 구속이라는 절체절명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 신도들은 유 전 회장의 출소를 손꼽아 기다리며 조직 재건에 모든 걸 바쳤다. “(출소한) 그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로 서로를 다독이며 4년을 견뎌낸 것이다. 그 결과 유 전 회장이 출소할 때쯤 구원파는 과거보다 더 강력한 모습으로 재건될 수 있었다. 당시 신도들은 유 전 회장이 출소한 뒤 내놓은 자서전이자 시집 ‘꿈같은 사랑’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외웠고 전도에도 활용했다고 한다. 세월호 사고라는 전대미문의 사건과 유 전 회장의 죽음에도 구원파가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반론보도문

동아닷컴의 2014년 07월28일자 홈페이지 〈커버스토리〉면 ‘|미스터리를 넘어 04| 구원파 붕괴는 없다’ 제하의 기사와 관련해 기독교복음침례회측은 “기독교복음침례회가 1981년 설립될 당시 유병원 전 세모그룹 회장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해당 교단에서 교주로 추앙받거나 신격화된 사실이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또한 기독교복음침례회측은 “해당 교단의 안성교회이자 영농조합인 금수원의 직원 중에는 보도에 나온 미국 대학을 졸업한 유명 대학 교수의 아들과 같은 인물은 재직한 바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주간동아 948호 (p18~20)

한상진 ‘신동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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