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6

2014.07.14

‘지휘자가 사랑한 지휘자’ 봉인 해제

카를로스 클라이버 10주기

  •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tris727@naver.com

    입력2014-07-14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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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일요일(7월 6일)은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카라얀, 번스타인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가장 각광받았던 이 마에스트로는 2014년 7월 13일 슬로베니아에서 눈을 감았다.

    이 달은 클라이버의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그는 1930년 7월 3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였고, 따라서 그의 원래 이름은 ‘카를(Karl) 클라이버’였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에 가족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면서 ‘카를로스(Carlos)’로 개명했다.

    클라이버는 그 이름처럼 독일 지성과 라틴 열정을 겸비한 지휘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가 이끌어낸 탁월한 연주는 명석하고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예리한 직관과 풍부한 즉흥성까지 아우른 것이었다. 특히 지휘대 위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듯하던 그의 지휘 동작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효과적이며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음악이 들린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자유로운 환희’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큰 지지와 찬사에는 그에 상응하는 논란과 비난이 따르는 법이다. 그 상당 부분은 무지 혹은 질투에 기인한 억측이나 오해였지만, 한편으론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단적으로 회피했던 클라이버 자신이 자초한 면도 분명 있었다.

    그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협소한 레퍼토리’였다. 그의 공연 목록을 살펴봐도 그렇고, 남겨진 음반과 영상물을 헤아려 봐도 그는 지극히 제한된 레퍼토리를 가진 지휘자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기껏해야 오페라 10여 편, 교향곡 7~8편과 몇 개의 서곡 정도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 오해는 공연 횟수에 관한 것이다. 특히 만년에 그는 해마다 손에 꼽을 정도의 공연만 지휘했고, 예정했던 공연을 취소한 경우도 적잖았다. 그래서 관계자들과 팬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고, 적들은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지휘자라고 손가락질했다. 오죽하면 그의 멘토였던 카라얀조차 농담과 불평을 섞어 “그는 냉장고가 비어야 비로소 지휘할 생각을 한다”고 했을까.

    그러나 그런 일들은 극단적 완벽주의자였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뮌헨, 뒤셀도르프 등지에서 전형적인 독일식 카펠마이스터 수련기를 보냈던 그는 사실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다룰 수 있었지만, 그중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최고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작품들만 엄선해 무대에 올렸다. 또 그 과정에서 작품마다 적어도 1~2년 준비기간을 거치고 평균보다 많은 리허설을 가졌다.

    그러나 유난히 예민하고 소심하기도 했던 그는 리허설 단계, 심지어 공연 도중에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중도에 포기하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당대 최고 거장이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그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해와 억측이 해소된 것은 그의 사후, 그에 관한 정보의 봉인이 풀리면서였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찰스 바버의 책 ‘지휘자가 사랑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그의 팬들에게 필독서라 하겠다. 또 지인들의 증언으로 꾸며진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상물, 게오르크 뷔볼트의 ‘I am lost to the World’(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와 에릭 슐츠의 ‘Traces to Nowhere’(어디에도 없는 흔적)도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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