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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우리꽃 산책

봄 기다리며 수줍은 치마 펼쳤네

처녀치마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ymlee99@forest.go.kr

봄 기다리며 수줍은 치마 펼쳤네

봄 기다리며 수줍은 치마 펼쳤네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고 보니, 새봄이 더욱 간절히 기다려진다. 숲엔 지난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속에선 이미 지난가을부터 생명의 씨앗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을 터인데, 부디 새봄에 기쁘게 만나길 기대해본다.

식물은 대부분 한겨울보다 겨울 끝, 봄 시작점에 ‘동해(凍害)’를 입는다. 추운 겨울은 미리 예견하고 준비하기 때문에 괜찮은데, 봄이 온 줄 알고 섣부르게 연한 순을 내밀었다가 뒤늦은 추위에 호되게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곳에선 식물이 더욱 풍부하고 건강하게 자란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심하게 불어닥칠 무렵 숲에 쌓여 있다 서서히 녹는 눈이 수분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처녀치마는 쌓인 눈 속에서 꽃이 피는, 새봄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꽃 가운데 하나다. 보랏빛 꽃송이가 참 예쁜 꽃이다. 처녀치마의 가장 큰 장점은 땅 위에 방석처럼 펼쳐지는 잎들이 겨울이 올 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묵은 잎 위에 다시 새잎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서 꽃대가 쑥 올라와 꽃이 핀다. 성급한 꽃송이는 꽃대를 미처 올리기도 전 불쑥 올라와 꽃대가 자라는 동안 함께 꽃을 피운다. 새봄을 어수선하게 한다.

봄이 한창 아름다운 어느 날, 처녀치마 꽃송이가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0개까지 꽃대 끝에 모여 달려 땅을 향해 핀다. 길쭉한 꽃잎들이 펼쳐지면 꽃들이 매어 달린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져 전체적으로 마치 작고 아름다운 아가씨의 짧은 치마처럼 보인다. 이 꽃이 ‘처녀치마’라는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다.

연보랏빛 꽃잎은 개체에 따라 좀 더 진하기도, 여리기도 하다. 꽃잎의 다양한 색감과 함께 꽃잎 사이로 좀 더 길게 뻗어 나오는 수술은 장식처럼 포인트가 된다. 처녀치마 꽃송이들은 치마 중에서도 아주 현대적이면서 귀엽고 아름다운 치마가 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치맛자락풀’ ‘성성이치마’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자화호마화(紫花胡麻花)’라고 한다.



여름쯤 익는 열매는 삭과로 마른 화피에 싸여 있으며, 익으면 3개 능선으로 벌어지는데 그 안에 길쭉한 씨앗이 들었다. 꽃이 필 때 한 뼘쯤 되는 키는 기온이 오르면서 점차 자라 열매가 익을 때쯤에는 성인 무릎 높이까지 크기도 한다. 키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조금이라도 높이 자라 씨앗을 좀 더 멀리 보내려는 처녀치마의 노력이 안쓰럽다.

처녀치마는 봄 산행을 떠나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지만, 야생화를 찾는 이에게는 관상자원으로 주목받는다. 봄철 꽃구경이 좋은 것은 물론, 오랫동안 화단에 남은 잎이 지면을 덮는 것도 처녀치마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화분이나 수반 같은 곳에 키우는 작은 꽃 소재로도 인기 있다.

처녀치마는 백합과에 속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야생화다. 활엽수 낙엽이 수북이 쌓여 비옥하고 습윤한 숲 비탈면을 눈여겨보면 꽃은 없어도 방석처럼 땅에 펼쳐진 처녀치마 잎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봄철 처녀치마의 보라색 꽃을 구경할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이렇게 여리고 고운 처녀치마 꽃송이도 모진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올라온 장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지금 한겨울 같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눈 속에서 피어날 처녀치마처럼 아름다운 내일이 준비돼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주간동아 2014.01.27 923호 (p104~104)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ymlee99@fore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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