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1

2013.11.04

티베트 구원 간절한 진언 “옴마니반메훔”

우주 구성요소 지수화풍 형상화… 주변엔 크고 작은 사원 30여 개 들어서

  • 정찬주 소설가 ibuljae@naver.com

    입력2013-11-04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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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구원 간절한 진언 “옴마니반메훔”

    ‘깨달음의 사원’이라는 뜻의 보드나트 스투파.

    인천국제공항에서 네팔 수도 카트만두까지 비행시간은 6시간 30여 분. 카트만두 하늘은 흐려 있다. 비행기 창에 빗방울이 하나 둘 달라붙었다가는 사라진다. 손목시계를 3시간 15분 뒤로 돌려 네팔 시간으로 고친다. 네팔이 내게 주는 입국 선물이다. 그러나 귀국할 때는 반납해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세상은 무엇 하나 공짜가 없는 법이다.

    알다시피 히말라야 산맥 아래에 자리한 네팔은 여러 소수 종족으로 이뤄진 나라다. 네팔 국민은 대부분 힌두교 신자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의 잣대는 여지없이 빗나간다. 네팔은 힌두교 신자 몇 퍼센트, 불교 신자 몇 퍼센트라고 구분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힌두교는 네팔 사람의 삶 자체고, 그 속에서 시바나 부처 등등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가 다를 뿐이다. 우리가 유교식 제사를 지내면서 가톨릭이나 불교를 믿는 것과 흡사한 맥락이다. 카트만두 세종학당의 실무를 기획하는 박우석 씨의 설명도 그렇다.

    “네팔 사람은 모두 힌디입니다. 그러나 힌두의 삶을 살면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제 판단에 의하면 60% 정도 됩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을 부디스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와 같은 종교인구 분석은 네팔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나는 네팔여행을 하기 전 전화로 박우석 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공항 청사 밖에서 지인들을 태울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해줄 사람은 하리(Hari) 씨다. 하리 씨는 2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한 직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편이다. 지인들과 나는 네팔에서 가장 큰 스투파(유골을 매장한 화장묘 건조물) 가운데 하나인 보드나트 스투파(높이 38m)로 행선지를 정한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탑이기도 하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는 하지만 우산 없이 걸을 만하다. 보드(Bodh)가 깨달음, 나트(Nath)가 사원이니 ‘깨달음의 사원’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네팔 사람은 그냥 보우다나트라고 한다. 스투파 부근의 마을 이름이 보우다(Bouda)이기 때문이다. 여행안내서의 이름보다 현지 별칭이 더 정겹다는 사실은 두말할 것도 없다.

    비좁은 도로에 차들과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다. 스투파까지는 더는 버스로 이동할 수 없다. 10여 분 걸어야 할 것 같다. 문득 붉은색 천지인 티베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든다. 네팔의 힌두 문화보다 티베트 불교 분위기가 아주 짙은 지역으로. 왜 ‘네팔 속 티베트’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된다. 실제로 보우다 지역은 티베트에서 망명한 난민 1만여 명이 1956년부터 정착해 티베트의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곳이다. 51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네팔로 넘어온 티베트 난민 가운데 일부는 히말라야 산맥 고산지대, 또 일부는 카트만두 보우다 지역으로 살길을 찾아서 왔던 것이다. 불심(佛心) 강한 그들이 보우다에 정착한 이유는 부처 사리를 봉안한 보드나트 스투파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터이다.

    보드나트 스투파의 조성 배경에는 한두 가지 전설이 있다. 천민들이 왕에게 허락받아 조성했다는 얘기가 있고, 가뭄이 심하게 들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기우제를 지내려 하는데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자 왕이 “누구든 얼굴을 보지 말고 머리를 자르라”고 명을 내렸고, 왕자가 한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 보니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왕자는 슬픔에 왕의 명복을 빌려고 탑을 쌓았는데 물 대신 이슬을 받아 조성했다 해서 보드나트를 ‘이슬의 탑’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얘기는 전설일 뿐이다. 천민을 내세운 전설은 ‘정성으로 켠 등불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다’는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처럼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는 종교적 신심이 깃들어 있다. 왕의 전설에는 고난을 당하는 백성에게 어떤 정치를 펴야 하는지라는 왕의 태도를 강조하는 민초의 염원이 스며 있는 듯하다.

    그런데 보드나트 조성에 대한 하리 씨의 설명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어서 귀가 솔깃해진다.

    “제가 본 책에서는 1500년 전 이 지역을 다스리던 릿차비족 왕조의 만데비라왕이 부처님 사리를 모시려고 조성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릿차비족이 인도 북부에서 카트만두까지 올라와 살았다는 점도 흥미롭거니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한 지 1000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존경했다는 것도 경이롭다. 특히 인도 북부 바이샬리 지역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도시국가로, 석가모니 부처가 그곳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몹시 사랑해 세 번이나 찾아갔던 도시이기도 하다. 부처의 이모 마하빠자빠띠가 출가했으며, 유녀(遊女) 암바빨리가 부처에게 귀의한 뒤 망고동산을 기증했던 곳이 바로 바이샬리다. 그런가 하면 바이샬리는 부처가 자신의 열반을 3개월 전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그때 릿차비족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겪었다.

    티베트 구원 간절한 진언 “옴마니반메훔”

    네팔인들이 사원에서 오체투지(왼쪽)를 하고, 마니차를 돌리며 소원을 빌고 있다.

    신자들 ‘초르텐 쳄포’라고 불러

    이윽고 보드나트 스투파 앞에 선다. 붉은 가사 차림의 티베트 승려들과 검은 복장의 신자들이 마니차(불경을 새겨 넣고 돌릴 수 있도록 만든 둥근 통)를 돌리며 코라(탑돌이)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쪽에서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탑돌이는 시계방향,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돈다. 신이 오른쪽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지인들도 어떤 주술에 걸린 듯 티베트 신자들을 따라 탑돌이를 한다. 탑의 맨 하단에는 마니차를 돌릴 수 있도록 설치가 돼 있고, 사각 기단 위 하얀 반구에는 아미타불 108분이 감실에 봉안돼 있다.

    탑돌이를 마친 뒤 자세히 보니 스투파는 5가지로 구성돼 있다. 땅을 상징하는 4각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물을 상징하는 하얀 반구의 꿈바가 있고, 불을 상징하는 4면으로 된 하르미까가 있고, 바람을 상징하는 첨탑인 스삐레가 있고, 상단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우산 모양의 움브렐라가 있다. 부처의 두 눈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눈은 ‘제3의 눈’, 즉 지혜의 눈이라 하며, 물음표를 닮은 코 모양은 티베트어로 1이란 숫자인데 진리는 하나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스삐레는 13개 계단으로 돼 있는데 이는 열반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어쨌든 스투파에는 우주 구성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형상화돼 있으며, 티베트 신자들은 스투파를 거대한 탑이라고 해서 초르텐 쳄포(Chorten Chempo)라고 부른다. 오체투지를 하거나 ‘옴(우주) 마니(지혜) 반메(자비) 훔(마음)’을 외며 마니차를 돌리는 그들을 보니 법정스님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스님은 “순수한 신앙심으로 볼 때 앞으로 세계 불교의 중심은 티베트 불교가 될 것”이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스투파 주변에는 티베트의 크고 작은 곰파(Gompa·사원)가 30여 개나 들어서 있다. 티베트인들의 신앙심 에너지로 볼 때 중국이 비록 티베트 땅을 점령했지만 그들의 마음까지는 점령하지 못한 것 같다. 그들 마음의 스승은 중국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오직 석가모니 부처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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