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1

2013.11.04

3대 세습 김정은 낙점 백두 혈통 순례 ‘깜짝 행보’

김정일 세 달 만에 6번째 訪中 처음부터 끝까지 김일성 항일유적지 찾아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3-11-04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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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세습 김정은 낙점 백두 혈통 순례 ‘깜짝 행보’

    2010년 8월 27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면담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과 북·중 정상회담 모습. 당시 중국중앙(CC)TV가 보도한 영상이다.

    2010년 8월 하순 필자는 중국 베이징 특파원 부임 이후 첫 여름휴가를 맞았다. 휴가 일정을 앞두고 사무실 직원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설마 휴가 도중에 불려오는 일은 없겠지? 괜히 불안하네.” “에이, 걱정 마세요. 김정일만 안 오면 돼요.” 그런데 그 말 그대로, 휴가 한복판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찾았다. 2010년 5월 방중에 이어 불과 석 달여 만의 일이었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산둥성 칭다오시 한 바닷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뜬 회사 전화번호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어디야? 당장 사무실로 복귀해. 또 김정일 방중이다.” 모든 일정을 접은 채 가장 이른 베이징행 비행기표 찾기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회사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이어졌다. “언제쯤 도착할 수 있나? 서둘러.” 고(故) 김정일 위원장의 6번째 중국 방문, 필자에게 두 번째였던 김 위원장의 방중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4박 5일간이었다.

    방중을 예상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을 굳이 하자면, 김 위원장의 6번째 방중은 여러모로 예상을 깨는 상황 속에서 진행됐다. 방중 하루 전인 8월 2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의 석방 교섭이 명분이었다. 카터는 1994년 방북해 고 김일성 주석과 만나 1차 북핵 위기 당시의 긴장 완화에 기여한 바 있다. 따라서 2010년 8월 방북에서도 카터가 김 위원장과 면담할 것으로 관측됐다.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성지 순례’

    그런데 김 위원장 일행은 카터가 도착한 당일 밤 중국 방문 길에 올랐다.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카터는 8월 27일 곰즈 씨를 데리고 평양을 나와 조용히 귀국했다. 당시 많은 언론은 김 위원장이 카터를 따돌린 것은 무례한 행동이며 미국의 체면을 깎으려는 행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카터가 방북에 앞서 김 위원장과의 면담이 어렵다는 내용을 사전에 통보받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6번째 방중의 가장 큰 특징은 후계자인 3남 김정은과 함께 한 ‘세습 행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김정은이 동행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중 기간에나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나 필자의 취재원들은 김 위원장의 6번째 방중에 김정은이 동행했다고 언급했다.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동행 목격담은 중국 인터넷에서도 이어졌다. 중국인들은 김 위원장을 큰 뚱뚱이, 김정은을 작은 뚱뚱이로 묘사하며 목격담을 전했다. 당시 많은 언론이 김정은 동행의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됐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중국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세습을 강조하는 발언을 수차례 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전한 김 위원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에 조·중(북·중) 친선의 바통을 후대들에게 잘 넘겨주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사명” “대를 이어 조·중 친선을 강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안정을 수호하는 데 중요한 문제” “조·중 친선은 역사의 풍파와 시련을 이겨낸 친선으로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도 이에 대해 “중·조 친선을 시대와 더불어 전진시키고 대를 이어 전해가는 것은 쌍방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화답했다.

    3대 세습 김정은 낙점 백두 혈통 순례 ‘깜짝 행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방중 길에 들른 지린성 지린시의 위원중학교. 고(故) 김일성 주석의 모교다. 중국중앙(CC)TV가 보도한 영상이다.

    석 달여 만에 중국을 다시 찾은 김 위원장 일행은 과거 5차례 방중 루트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고 김일성 주석의 혁명 유적지를 돌아보겠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른바 북한판 ‘성지 순례’ 혹은 ‘백두 혈통 순례’인 셈이다. 중국 입국 경로도 과거 방중 때 이용했던 신의주-단둥 노선이 아니라 만포-지안 노선을 이용했다. 김 위원장 부자는 김 주석의 모교인 위원중학교(지린성 지린시 소재)와 김 주석의 항일유적지인 동북항일연군 기념관(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소재) 등을 찾았다. 지린성의 성도 창춘시에서 후 주석과 북·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방중 마지막 날에도 김 위원장 부자는 하얼빈 근처 무단장에 있는 김 주석의 항일유적지를 순례했다. 방중 일정의 처음과 끝이 모두 김 주석의 ‘혁명 성지 순례’였던 것이다.

    “투먼에 관심 많다. 또 보자.”

    방중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김 위원장은 한 달 뒤인 9월 27일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제3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를 소집했다. 44년 만의 당 대표자회 개최였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김정은으로의 3대 권력세습에 공식 돌입함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결국 김 위원장의 6번째 방중은 후계 공식화를 앞두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혈통을 강조하면서 후계자 김정은의 입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방중 직후 중국 정부가 보인 반응도 흥미롭다. 중국 외교부는 김정은의 동행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초청 명단에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북한은 김정은의 국제무대 데뷔가 가장 극적인 시간대에 효과적으로 이뤄지길 원했고, 따라서 김정은의 동행을 비공개로 해달라는 요청을 중국 측에 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김정은 동행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서 ‘초청 명단에 없었다’는 에두른 외교적 표현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6번째 방중을 정리하고 귀환하는 길에 김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투먼 역에 내렸다. 지린성 투먼은 함경북도 온성군과 마주하는 접경 도시다. 필자는 투먼 역에서 김 위원장이 한 발언 등 현장 상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김 위원장 일행은 투먼 역에 내려서 20분 정도 머물렀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의 링지화 서기와 다이빙궈 국무위원 및 지린성 고위 인사 등이 역으로 나와 김 위원장 일행을 환송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이 지역에 관심이 많다. 또 보자”는 말을 했다.

    김 위원장이 투먼에 관심이 많다고 한 것은 중국 두만강 유역 개발 계획인 이른바 ‘창지투 프로젝트’, 즉 지린성의 창춘과 지린, 투먼 일대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은 2010년 창지투 프로젝트를 국가사업으로 선정했다. 남부와 동부 연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한 동북지역을 새로운 경제성장 축으로 키우려는 조치다.

    창지투 프로젝트는 북한 나진항, 청진항과 연계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물류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진항, 청진항을 통해 동해 출항권을 확보한다면 중국은 엄청난 물류비 절감효과를 얻게 된다. 또 중국의 태평양 진출이라는 측면에서도 함의가 적지 않다. 특히 나진항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라 러시아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잘 아는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줄다리기를 해오고 있다.

    6번째 방중에서 김 위원장은 창춘과 지린, 투먼 등 창지투 지역의 땅을 모두 밟았다. 북한과 가까운 중국 동북지역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방중 일정을 마치고 귀환한 당일인 8월 30일 중국중앙(CC)TV의 보도에서도 읽을 수 있다.

    “동북지역은 북한과 인접한 지역이고 지형과 공업 시스템이 비슷하다. 북한은 동북지역과의 교류협력 강화를 원하고, 중국은 그 방법을 열심히 연구할 것이다.”

    김 위원장이 투먼 땅을 밟은 것은 이때, 즉 2010년 8월 30일이 처음이다. “김 위원장 방문 이후 투먼은 획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당시 지린성에 있던 필자의 취재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표적인 변화로 ‘중국 정부의 북한 인력 고용’을 언급했다. 중국 최초로 정부 차원에서 북한 인력을 공식 수입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이듬해 사실로 확인됐다. 필자는 북한 인력 취재를 위해 수차례 투먼에 다녀왔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앞으로 별도 지면을 통해 자세히 전하도록 하겠다.

    3대 세습 김정은 낙점 백두 혈통 순례 ‘깜짝 행보’

    중국 지린성 투먼과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의 접경 표지.

    2010년 5월 방중 때 후 주석은 김 위원장에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요구하며 질타성 발언을 했고, 이에 격분한 김 위원장은 후속 일정을 취소한 채 조기 귀환했다(‘주간동아’ 910호 참조). 불과 석 달여 만에 다시 찾은 김 위원장에게 중국 지도부는 개혁개방을 거듭 요구했다. 후 주석은 중국이 개혁개방 30년을 통해 이룬 성과를 강조하며 김 위원장에게도 외부와의 협력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룰 것을 권했다. 당시 북·중 정상회담에 대한 CCTV의 보도 내용은 이렇다.

    “(후 주석은) ‘경제발전은 자력갱생도 중요하지만 외부와의 협력도 필요하다’면서 ‘이는 국가발전 가속화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북한의 자존심인 자력갱생을 지적한 것이 내심 불쾌했을 것이다. 중국은 5번째 방중에 이어 6번째 방중에서도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적극적인 훈수를 둔 것이다. 전면적 변화가 아닌 단편적 변화만 추구하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답답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오리무중 김정일 행적 찾아낸 특종의 흥분

    김 위원장의 6번째 방중은 필자에게 특종의 흥분을 만끽하게 했다. 5번째 방중 때 남긴 오보의 부끄러움을 씻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김 위원장 일행이 탄 전용열차는 8월 28일 밤 9시 넘어(현지시각) 창춘 역을 출발했다. 창춘에서 후 주석과의 정상회담 등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뒤였다. 그런데 창춘을 떠난 뒤 전용열차의 행적이 갑자기 사라졌다.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모든 언론이 오리무중인 김 위원장의 행선지를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한 언론사가 8월 29일 오전 11시(한국시각) 무렵 긴급 뉴스를 타전했다. 김 위원장 일행이 옌볜조선족자치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긴급 타전된 기사의 바이라인에는 중국 3개 지역에 파견된 기자 3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필자 취재로는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아니었다. 미심쩍어 하는 데스크를 뒤로한 채 김 위원장 방문이 예상되는 지역을 상대로 집중 취재를 벌였다. 같은 날 오후 7시 무렵 이 언론사는 김 위원장 일행이 옌볜조선족자치주를 둘러봤다며 최초의 옌볜조선족자치주 방문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재차 보도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각 YTN에서는 김 위원장 일행이 하얼빈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는 필자 기사가 긴급 뉴스로 방송됐다. 창춘을 중심으로 보자면 하얼빈과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정반대 방향이다. 필자는 하얼빈 쪽에서 김 위원장 방중의 징후를 속속 확인하고 1보를 전한 뒤 곧바로 생방송에 참여했다. 보도 직후 일본 언론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렵게 옌볜조선족자치주 쪽으로 가는 중인데 방향을 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며 필자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결국 김 위원장의 하얼빈 도착 소식은 금세 사실로 드러났다. 짜릿했다. 오보의 처참한 기억이 한 방에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감사를 표해야 할 인사가 있다. 당시 필자와 더불어 ‘김정일 행방 추적’의 공동 작업을 펼친 인물이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긴박하면서도 즐거웠다.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베이징 특파원 시절 진위 여부를 알기 어려운 대북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는 필자에게 침착한 가늠자 구실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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