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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매일 신나는 생활 제발 익숙하게 살지 마라”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현역 노인’ 이근후 박사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매일 신나는 생활 제발 익숙하게 살지 마라”

“매일 신나는 생활 제발 익숙하게 살지 마라”

이근후
● 1935년 대구생
● 1961년 경북대 의과대학 졸
● 1975년 경희대 대학원 약리학 의학박사
● 전 이화여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수
● 現 가족아카데미아 이사장, 이화여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명예교수



“아버지 용돈 만 원만 주련?”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면서 ‘동그랑땡(돈)’을 달라는 시아버지에게 어느 날 며느리가 정색하고 물었다. “아버님, 우리보다 경제력과 능력도 있으시고 잘사시면서 왜 그러세요? 정말 돈이 필요하세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들, 며느리에게 용돈을, 그것도 달랑 만 원만 달라는 이 남자, 이화여대 의대 명예교수이자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이근후(79) 박사 얘기다. 그를 만나자마자 며느리처럼 “도대체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헷갈리는 자식과 제자들

“나이 들어 자녀들과 즐겁게 지내려면 젊어서 안 하던 귀여운(?) 짓을 하면 좋아요. 자식들은 부모도 나이 들면 약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늙으면 초라해지거든. 그럼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왜 저렇게 됐을까. 저럴 분이 아닌데’ 하고 충격을 받지. 그걸 연착륙시켜주려고 젊었을 때와 달리 어린애 짓도 좀 하고 그러면, 자식들이 ‘허, 참’ 하고 웃으면서 ‘야금야금’ 속아요. 평소 가벼운 재롱으로 미리 예방주사를 맞히는 거요.”

이 박사는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함에도 “돈 들어오는 소스가 자녀와 제자들”이라고 했다. “용돈 만 원만”은 자식들보다 제자들을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스승의 날 선물을 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당당히 현금으로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놈들이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할지 헷갈려 하기에 네팔로 의료봉사를 떠날 때 만 원씩만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100만 원을 들고 와요. 그래서 지금 내가 만 원을 받아 가면 자네들이 내년에 ‘선생님, 언제 네팔 가십니까?’ 하고 부담 없이 물을 텐데 100만 원을 받아 가면 ‘또 네팔 가십니까?’ 할 거 아니냐고 말했지. 난 ‘언제 가십니까?’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들이 타협해 10만 원, 20만 원씩 모아서 줘요. 그럼 그걸로 약품하고 작은 선물들을 사서 가는 거지.”

최근 이 박사가 펴낸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에는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박사는 “특별할 것 없는 보통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라고 하지만 책에는 노년의 삶을 성공적으로 잘 꾸릴 수 있는 지혜와 처방이 수두룩하다.

50대가 시작되면 남녀 할 것 없이 갱년기가 찾아오고 몸 여기저기가 예전 같지 않다. 그쯤 되면 “벌어놓은 돈도 없고 지금까지 이룬 게 별로 없는데 어느새…”라며 나이 듦에 대한 초조함, 불안감이 스멀스멀 몸과 마음을 좀먹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박사는 “나이 듦에 대한 비관과 두려움이 오히려 사람을 더 빨리 늙게 한다”면서 “평소 나이 듦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노년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별문제 없을 것 같은 그도 실은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간다. 왼쪽 눈 실명, 당뇨, 고혈압, 관상동맥협착, 담석, 통풍, 허리디스크를 앓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지만 스스로 좋은 걸 찾아 즐기며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한다.

“나이 들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신체적 고통은 좀 고약한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요. 나이 먹어 병들고 아픈 건 자연의 이치니까, 거기 맞춰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면 즐겁지. 노인은 전철표도 공짜고, 공원 같은 데 입장료도 할인해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런 것도 나이 들어 얻는 재미라고 보지.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하니 인터뷰도 하는 거 아니오.”

이 박사는 젊은 시절부터 파격적인 일을 하면서 삶의 재미를 찾았다. 의료진과 가족의 반대에도 폐쇄적인 정신과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사이코드라마 치료법을 도입했다. 정신질환 치료에 대한 관심을 끌려고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고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부터 네팔로 의료봉사를 다녔다. 그 밖에도 보육원봉사, 시낭송회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 한편 부인인 이동원(77) 이화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함께 세운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는 부부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 역량을 토대로 바람직한 가족 모습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회갑 잔치 권하는 이유

“매일 신나는 생활 제발 익숙하게 살지 마라”

1982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씩 네팔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이근후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5년 네팔에서 간질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인생 반환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보며 노년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등산을 좋아해서 히말라야에도 여러 번 다녀왔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그다음은 어디로 내려갈지 아래를 굽어보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걸 60세로 보고 교수 정년퇴임 5년을 앞둔 시점에 준비했지. 요즘 사람은 회갑잔치를 싫어하는데 그건 자기 모습을 바로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 꼴’을 보기 싫은 거지. 근데 정상에 올랐으면 어차피 집에 돌아가야 할 거 아니오. 회갑을 안 한다고 50대에 머무르나? 그래서 나는 회갑 잔치를 하라고 사람들한테 적극 권해요.”

그가 선임교수들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퇴임사를 들어보면 크게 두 가지예요. 한 부류는 자기만 늙는 줄 알고 남은 우리보고 잘 먹고 잘살라는 식으로 화를 내요. 평생 학교에 몸담아 신세를 져놓고 나이 든 데서 오는 분노를 거기다 대고 터뜨리는 거지. 근데 한 선생이 이런 얘길 해요. 정년퇴임으로 학교를 떠나지만 영국으로 유학 간다고. 그 말이 무척 신선한 거야.”

거기서 힌트를 얻은 이 박사는 재작년 고려대 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했다. 그 일은 신문기사에 날 정도로 화제였다.

“학위증을 받으러 연단에 올라가 총장한테 꽃다발을 건넸어요. 축하 받아야 할 사람이 되레 꽃다발을 주니까 장내에 폭소가 터졌지. 그건 나이 들어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 대학에 대한 고마움과 4년간 나를 지도해준 교수들에 대한 내 나름의 인사였어요.”

이 박사는 “일생 동안 해온 공부 단계를 놓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사이버대학에서 시작한 공부가 제일 신나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졸업 후 영화에 매료돼 영화 연구 동아리에 가입한 이 박사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워크숍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지식이 쌓이면 영화 관련 일을 하는 막내아들에게 ‘엄청 골치 아파 보이는 실험영화’에 대해 배울 생각이다.

이 박사가 말하는 ‘노년을 즐겁게 사는 방법’은 스스로를 알고 자기 기준을 확실하게 세우는 것이다. 경제력과 능력, 어떻게 살 것인지 세 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얘기다.

“그림도 좋아하고 사진도 좋아해 취미로 둘 다 하고 있어요. 내가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프로가 되는 건 포기했지. 능력이 아마추어밖에 안 되는데 전문가가 되겠다고 용을 써봐요. 그 일이 즐겁고 재밌겠어? 맘 편히 아마추어로 하니까 재미있는 거지.”

“매일 신나는 생활 제발 익숙하게 살지 마라”
노년을 재밌게 사는 법

그는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조건이 다르지만 설령 그 조건이 나쁘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고 솟아날 구멍을 찾다 보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는 ‘내가 이렇다’ 하고 남에게 내세울 때 잠깐 즐거운 거지, 지나고 보면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즐거운 거요. 그런데 사람들은 과정에서 오는 소소한 재미를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남들과 자꾸 비교하니까 시들해 보이는 거지.”

이 박사 가족은 박사 부부와 결혼한 자녀 넷을 합쳐 다섯 가구에 손자손녀까지 13명이 10년 넘게 한 지붕 아래 산다. 새로운 가족공동체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실험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최고로 잘한 일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손자손녀 교육은 독립적으로 부모가 맡기, 다름을 서로 인정하기, 여건이 안 되면 언제든 거절하기 등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철저히 지킨 것이 화목한 동거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이 박사에게 컴퓨터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 보물. 나이 들어 맘껏 움직이지 못할 때 컴퓨터가 지인은 물론, 공동체가족 사이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통도구가 된 것이다.

“e메일을 주고받고 댓글을 달다 보니 ‘ㅋㅋㅋ’ ‘ㅎㅎㅎ’ 같은 문자나 낯선 기호가 너무 많은 거야.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친근감, 즐거움 등 다양한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문자와 이모티콘이라는 걸 알았지. 요즘은 나도 젊은 친구나 손자손녀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어요. 집안 대소사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서로 e메일을 주고받아요. 그 외에 천문학자인 큰아들과 우주를 주제로 논하고 영화 관련 일을 하는 막내아들과는 영화 얘기를 주고받으니 공부도 되고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고양이를 좋아하는 손녀한테 고양이 캐릭터를 e메일로 보내고 고양이에 대한 상식을 검색해서 들려주면 ‘좋아라’ 하지.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손자손녀들 작은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해요.”

이 박사는 어린 시절 동무들과 밤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별을 주우려고 뛰어다닌 적이 있다. “아직도 유성은 별이 누는 똥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이 박사는 제자들에게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양복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데다, 늘 메고 다니는 크로스백에 대해서는 “사막에 떨어져도 사흘간 살 수 있는 서바이벌 키트가 들어 있다”고 눙치기 때문이다. 교수답지 않은 교수,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을 보며 제자들은 즐거워하고 이 박사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마흔이 넘었다고 자식에게 꼭 모범적인 아버지 모습을 보여야 하고, 노년이 됐다고 세상 이치를 통달한 것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어요. 나이답게 사는 것이 언제나 엄숙하게 살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마음이 건강하고 인생도 재밌어요. 그걸 잘 조율할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이고 나잇값을 하는 거요.”



주간동아 2013.06.17 892호 (p32~34)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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