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6

2013.05.06

‘강세황 70세 자화상’ 예술계 절친 김홍도 작품

강세황 노년에 오른팔 불편…“나의 수고 대신” 대필 공개적으로 밝혀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5-06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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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세황 70세 자화상’ 예술계 절친 김홍도 작품

    1 김홍도가 그린 ‘강세황 70세 자화상’. 2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71세 초상’.

    ‘주간동아’ 885호에서 필자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생전에 대필을 쓴 적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번엔 1782년 당시 38세인 김홍도(1745~?)가 강세황(1713~1791)을 대신해 그린 ‘강세황 70세 자화상’(그림1)을 소개하려 한다. 그냥 보더라도, ‘그림1’은 혈기왕성한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초상화다. 고위 관료직에 있던 70세 노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다.

    1783년 강세황의 셋째 아들 강관(1743~ 1824)은 당시 독보적 초상화가였던 28세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71세 초상’(그림2)의 제작 과정을 집안의 ‘계묘년(1783) 가을 일을 기록’한 ‘계추기사(癸秋記事)’에 상세히 기록했다.‘계추기사’는 ‘그림2’ 이전에 그려진 강세황의 자화상과 초상화 제작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일찍이 영조 임금 병자년(1756) 여름 음력 4월에 아버지께서 소품의 자화상을 그리신 적이 있다. 이게 초상화의 시작이다. 그 뒤로 여러 번 화사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으나 언제나 꼭 닮지 않았다. (중략) 그간 여러 번에 걸친 초상화 모사는 둘째 형님(강완)이 기쁘게 수행하였다. 지금 초상화 정본(그림2)이 새로 완성되니….”

    ‘계추기사’에 없는 강세황 자화상

    강세황이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린 것은 44세 때인 1756년이다. 그 후 그의 둘째 아들 강완(1739~1775)이 여러 차례 화가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으나 모두 미흡했다.



    주의를 끄는 것은 ‘계추기사’에서 ‘그림1’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강관은 오래 전의 자화상과 초상화는 말하면서 ‘그림1’은 뺐을까. 만약 강세황이 ‘그림1’을 그렸다면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바로 1년 전 일이고, ‘그림2’에 버금가게 잘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1’이 강세황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가족 모두가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1766년 54세인 강세황은 자서전 ‘표옹자지(豹翁自誌)’에서 “내가 일찍이 자화상을 그렸는데 오직 그 정신만을 얻어, 속된 화공들의 초상화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이는 그가 49세인 1761년 그린 ‘복천 오부인 86세 초상’(그림3)에서 확인된다. 오부인의 얼굴 부분을 보면, 강세황은 얼굴 부위의 고저에 따른 입체감이나 피부의 질감을 살린 육리문(肉理紋) 묘사보다 주요 골격만을 절제된 필선으로 표현해 오부인의 정신을 나타냈다.

    강세황은 ‘표옹자지’에서 “원나라 왕몽(王蒙)과 황공망(黃公望)의 산수화 화법을 배웠으며, 수묵으로 난초와 대나무를 그렸는데, 깨끗하고 굳세어 세속의 티끌이 하나도 없다”고 자부했다. 더욱이 1763년 영조의 “천한 기술로 강세황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다시는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마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그 은혜에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린 다음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맹세했다. 따라서 1763년 이후 그는 사람들이 업신여길 수 없는 높은 벼슬에 나아가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강세황은 61세가 돼서야 영릉 참봉에 임명돼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늙은 나이를 핑계로 곧 사임했다. 그다음 해인 1774년 음력 12월 사포서 별제(종6품)가 됐고, 1775년에는 한성부 판관(종5품)이 됐다. 1776년 기구과(耆耉科)에 수석 합격해 동부승지(정3품)에 임명됐으며, 1778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 합격해 한성부 우윤(종2품)과 부총관이 됐다. 1781년 음력 8월 27일에는 부총관으로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지휘 감독했다. 이튿날 정조는 그에게도 초상화 유지본(油紙本) 1부를 그리게 했으나 노쇠함을 들어 사양했다.

    1783년엔 기로소(耆老所)에 들었고,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 판윤(정2품)에 임명됐다. 1784년 도총관에 임명됐으며, 그해 겨울 부사로 중국 사행 길에 올라 베이징에 갔다가 1785년 봄 귀국했다.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붓글씨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베이징에선 일행인 이사앙의 요구로 부채에 담묵으로 ‘묵목단(墨牧丹)’을 그렸다.

    강세황은 1774년부터 바쁜 관직 생활에도 간간이 시간을 내어 그림 요구에 응했거나, 스스로 그리고 싶을 때 가볍게 그렸던 것 같다. 당시 그림은 ‘그림1’이 그려진 1782년 작품 ‘약즙산수’(그림4)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31년 전인 1751년 그린 ‘도산도’(그림5)에서 발전한 것으로, 그가 노년에 젊은 날보다 필력이 더욱 굳세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노년에 오른쪽 팔이 고통스럽게 얽매여, 붓을 잡거나 옷을 입는 것이 줄곧 불편하여(衰年右臂苦拘牽 把筆穿衣摠不便)” 정교함이 요구되는 ‘그림1’을 그릴 수 없었다.

    ‘강세황 70세 자화상’ 예술계 절친 김홍도 작품

    3 강세황이 그린 ‘복천 오부인 86세 초상’. 4 강세황이 그린 ‘약즙산수’. 5 서울 국립중앙 박물관이 소장한 강세황의 ‘도산도’.

    나이와 지위 초월한 참된 친구

    그렇다면 ‘그림1’은 누가 그렸을까. 흥미롭게도 1786년 강세황이 김홍도에게 써준 ‘단원기(檀園記)’와 ‘단원기 우일본’에 그 답이 있다. 먼저 강세황은 자신과 김홍도의 사귐을 나이 및 지위를 초월한 ‘예술계의 참된 친구’라고 표현했다.

    “나와 김홍도의 사귐은 앞뒤로 세 번 변했다. 시작은 그가 어려서 내 문하에 드나들 때로,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그림 그리는 비결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은 같은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마주했다. 마지막은 함께 예술계에 있으며 참된 친구의 느낌이 있었다.”

    강세황은 김홍도가 초상화에 가장 뛰어나다면서 1773년 영조 초상화와 1781년 정조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뽑혔던 일을 언급했다.

    “영조 말년에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것을 명하여, 당시 초상화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데 김홍도가 뽑혔다. (중략) 우리 정조 임금께서 왕위에 오른 지 5년, 선왕의 성대한 사업을 따르고자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반드시 최고의 화가를 기다림에 관료들이 모두 ‘김홍도가 있으니 다른 화가를 구할 게 없다’고 말하였다.”

    나아가 강세황은 김홍도가 자신의 대필이었음을 밝히며, 그의 노고를 잊지 못했다.

    “매번 그림 그릴 일이 있을 때마다 김홍도는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나의 수고를 대신하였다. 이는 더욱이 내가 잊지 못하는 바다.”

    1777년부터 1783년까지 강세황과 김홍도 두 사람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이때 강세황은 벼슬이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인생 황금기를 구가했다. 김홍도는 1777년부터 1781년 음력 8월 26일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있기 전까지 관직 없이 이름 난 화가로만 활동했다. ‘그림1’이 그려진 1782년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동빙고 별제(종6품)로 근무 중이었다.

    강세황이 말한 김홍도와의 ‘예술계의 참된 친구’ 단계는 1777년 이후 일이다. 1781년 강세황과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의 감독관과 화가로 만나, 초상화 제작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따라서 1782년에 강세황이 김홍도로 하여금 ‘그림1’을 대필하게 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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