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7

2013.03.04

봄이 급했나, 눈 헤치고 꽃자루 쑥

노루귀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03-04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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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급했나, 눈 헤치고 꽃자루 쑥
    우리 꽃에 대해 강의할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전문가나 학생이 아닌, 풀과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꽃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도 자꾸 잊히는 식물 이름을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게임하듯 추측해보고, 직접 만나보면 재미나서 의외로 쉽게 기억됩니다.

    산자락에 봄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노루귀도 그런 꽃 가운데 하나입니다. 꽃이 핀 뒤 그 아래에서 말려 올라오는 어린잎을 보면 왜 노루귀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그 연유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노루 귀를 꼭 닮았거든요. 그것도 솜털 보송한 사랑스러운 아기 노루 귀를 말이지요.

    만일 노루귀를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라면 봄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산에 오르는 게으른 산행꾼이거나 빨리, 높이 올라가는 데만 신경 쓰느라 주변에 자리한 소중한 풀과 나무를 헤아리지 못하는 돌격형 산행 스타일일 확률이 높습니다. 노루귀는 전국 어느 산에서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니까요.

    숲에 봄이 오면 올망졸망 키 작은 봄꽃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행여 키 큰 나무들이 햇빛을 가릴까 서둘러 올라와 꽃을 피우는 부지런한 식물들이지요. 특히 노루귀는 잎도 없이 꽃자루부터 올라옵니다. 얼었던 땅이 녹기 무섭게 연하디 연한 꽃자루를 반 뼘쯤 길이로 내보내는데, 그 꽃자루에 보드랍고 하얀 솜털이 다복하게 나 있지요. 한자리에서 나오는 여러 개 꽃자루 끝엔 2cm가 조금 안 되는 귀여운 꽃이 흰색 또는 분홍색, 아주 드물게는 보라색으로 핀답니다.

    사실 노루귀에는 꽃잎이 없습니다. 그럼 꽃잎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고요? 꽃받침(혹은 꽃잎과 꽃받침이 구분되기 전 모습이라 해서 ‘화피’라고도 합니다)이며, 그 가운데로 미색 수술과 좀 더 진한 노란빛 암술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잎은 꽃이 한껏 자태를 뽐냈다 싶을 즈음에야 나옵니다. 노루 귀같이 생긴 어린잎이 봄이 무르익으면서 활짝 펼쳐지지요. 개성 넘치게요.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잎 모양은 물론이거니와, 약간 두터운 질감이며 간혹 잎 표면에 나타나는 흰색 얼룩까지도요.



    노루귀는 봄소식을 전하듯 눈을 헤치고 작은 꽃을 내민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 설할초(雪割草)라고도 부릅니다. 학명 중 속명 헤파티카(Hepatica)는 간장(肝腸)이란 뜻을 가진 헤파티커스(hepaticus)에서 유래했는데, 세 갈래인 잎 모양이 간장을 닮아 생겨난 명칭입니다. 영어 이름 역시 이와 유사한 뜻을 가진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입니다.

    노루귀는 예로부터 장이세신(獐耳細辛)이라는 한약명을 가지고 약으로도 쓰였습니다. 잎은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는데, 미나리아재빗과 식물이 그러하듯 독성이 있어서 뿌리를 제거하고 살짝 데친 다음 물에 담가 쓴맛이나 독성을 우려내야 합니다. 이즈음엔 관상 자원으로 많은 주목을 받습니다. 특히 꽃 색깔이 다양해 색깔별로 모아 키우는 재미가 있답니다.

    봄이 오긴 하는 모양입니다. 성급한 노루귀가 올라올 숲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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