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8

2012.03.12

내 유년기의 홍콩 느와르 열병

  • 입력2012-03-12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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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유년기의 홍콩 느와르 열병
    세계의 느와르

    내게로 온 불량한 목소리는

    우연이었다.

    우리의 예산은 늘 빠듯하고

    여자들은 조금 더 나쁘거나



    남자들은 조금 덜 운이 좋았다.

    룰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불공평한 것들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

    라고 묻는다.

    시간은 빈 술병처럼

    금세 비워져버렸는데.

    ― 하재연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내 유년기의 홍콩 느와르 열병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사랑과 영혼’이었다. 열한 살 때였다. 하굣길에 극장 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두근거렸다.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쥐포 냄새를 맡으면 군침이 돌았다. 그리고 참, 아저씨가 있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아저씨.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붓에 물감을 발라 더 커다란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던 아저씨. 나는 아저씨 옆에 서서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저씨는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살빛은 하얗게, 눈은 푸르게, 입술은 붉게. 며칠 지나지 않아 그것은 극장 간판에 내걸렸다. 두 명의 남녀가 다정하게 도자기를 빚는 장면이었다. 사랑과 영혼. 둘 다 나에게는 너무 먼 단어였다.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은 그 영화를 내가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이니 쉬 가능하던 일이었다.

    ‘사랑과 영혼’을 보면서 나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나뿐 아니라 영화관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두 시간 내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의 눈이 하나같이 다 붉었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착하고 남자도 그에 못지않게 착했다. 그래서 둘 중 누군가에게 비극이 닥쳤을 때 마냥 슬플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사랑은 안타까웠고 그것을 좇는 영혼은 아름다웠다. 눈물은 뜨거웠고 가슴은 더 뜨거웠다. 한바탕 열병을 앓고 일어난 다음 날처럼, 사람들은 현기증을 호소하듯 흐느적거렸다. 영화가 두 시간이어서 참 아쉬웠고, 두 시간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날 이후 비디오 가게에 더욱 더 열심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드래곤볼’ 때문이 아니었다. 천진한 얼굴을 하고, 나는 아저씨에게 당돌하게 물었던 것이다. 애들 영화 말고 볼만한 영화가 뭐 없느냐고 말이다. 아저씨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영화 제목을 적어주었다. 나는 그 목록을 들고 비디오 가게에 갔다. 15세 이상 관람가나 연소자 관람 불가 마크가 찍힌 영화도 그리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었다. 엄마나 아빠 핑계를 대면 주인 아주머니는 눈을 딱 감아주었다. 그 시절이니 쉬 가능하던 일이었다.

    아저씨가 추천해준 영화는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감옥풍운’ ‘열혈남아’ ‘천장지구’ 등 대부분 4음절짜리 제목을 달고 있었다. 영화는 으레 도시에서 펼쳐졌다. 거기에는 싸늘한 분위기와 자욱한 연기, 권총과 룰렛, 그리고 골목과 자동차가 있었다. 백열등은 시종 위태롭게 깜박였다. 그 아래서 담배연기는 불안한 형태로 퍼져 나갔다. 나는 홍콩 느와르에 마음을 뺏기고 만 것이다. 주인공의 표정을 보며, 불공평한 세상의 “불공평한 것”에 분노할 수 있게 됐다. 느와르의 공식, 느와르의 “룰”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느 날, 나는 고독이란 말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어보기도 했다. 쓸쓸했다.

    내 유년기의 홍콩 느와르 열병
    “조금 덜 운이 좋았”던 남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짓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헛헛해진다. 그들의 선택은 번번이 치명적이었다.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세상이란 거대한 퍼즐의 쓸모없는 조각이 돼 코너로 내몰렸다. 더는 어디에도 맞지 않게 된 조각은 귀퉁이에 가서야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슬며시 떠오르는 예의 그 아저씨. 아저씨는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극장에서는 이제 고해상도로 출력한 포스터를 간판에 붙여놓는다. “룰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아저씨는 손에서 붓을 놓았을 것이다. 그 시절이니 쉬 가능하던 일이, 문득 뜨겁게 그립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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