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1

2011.08.22

상투를 잡는 ‘야성적 본능’ 행동재무학이 밝혀내다

투자자 적(敵)은 바로 자신

  • 이건 ‘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저자 keonlee@empas.com

    입력2011-08-22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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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투를 잡는 ‘야성적 본능’ 행동재무학이 밝혀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품에 투자해 마음고생만 실컷 하다가 막대한 손실을 본다. 또는 보수가 터무니없이 비싼 상품에 가입해 오랜 기간 마음만 졸이다 저조한 실적에 실망한다. 호되게 당한 다음 다시는 주식투자를 안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시장이 회복하고 주위에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다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시장이 활황을 넘어 과열로 치달을 즈음에는 과거의 쓰린 기억도 잊은 채 다시 모르는 상품, 보수 비싼 상품에 덜컥 가입하고 만다. 계속 실패하는데도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것이 바로 투자의 역사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전 세계 개미투자자의 공통점은 ‘묻지마 투자’인지도 모른다.

    묻지마 투자 계속 ‘실패의 악순환’

    개미투자자가 이렇게 덫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강력한 적이 집요하게 유혹하고 ‘협박’하기 때문이다. 이 적은 너무 막강한 탓에 거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만다. 심지어 개미투자자는 대부분 이 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실패를 순전히 불운 탓으로 돌린다. 이래서는 가망이 없다. 적을 알아야 한판 맞붙어 싸우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이 적은 실존할 뿐 아니라, 그 속성까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이 적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가. 어렵지 않다. 가까운 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서라.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라. 거울에 보이는 존재가 바로 당신을 집요하게 파멸로 이끄는 적이다. 그렇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나를 파멸로 이끌다니? 여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란 존재는 수십 년 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유전인자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조상이 지구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면서 배우고 적응한 결과가 내 유전인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몇백 년에 걸쳐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 소중한 유산 일부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흥분’과 ‘공포’를 생각해보자. 원시시대에 우리 조상은 사냥할 때 흥분과 공포의 덕을 톡톡히 봤다. 거대한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한 초인적인 힘과 용기도 흥분에서 나왔고, 맹수 등 더 강한 적을 만나면 공포에 질려 달아났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현대는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 세계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대다. 증권시장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가 사고파는 주식이나 금융상품은 모양도, 색도 없는 추상적 존재다. 실물 세계에서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던 흥분과 공포가 가상의 세계에선 오히려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치솟는 증시에 ‘흥분’해 올라타면 상투를 잡기 일쑤고, 증시가 고꾸라질 때 ‘공포’에 질려 주식을 내던지면 십중팔구 바닥이다. 막대한 손실을 보고 울화병에 걸려 수없이 맹세하지만, 주기적으로 도지는 고질병에 한숨만 나온다.

    이제는 적의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반복적인 실패를 자신의 무능이나 불운 탓으로 돌리지 마라. 범인은 당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다가, 때만 되면 나타나서 판을 뒤집어놓는 ‘야성적 본능’이다. 그러나 이 야성적 본능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원래 의도는 순수했지만, 아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야성적 본능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응 방안을 마련할 것 아니겠는가.

    근래에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에 의해 야성적 본능의 정체가 체계적으로 밝혀졌다. 행동재무학 덕에 우리가 투자할 때마다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심리학자 대니엘 카너먼은 행동재무학 분야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의 이론에 관해 몇 가지만 살펴보자.

    ‘과신(過信)’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운전 실력이 ‘평균 이상’인 사람만 손들라고 하면, 손드는 사람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 이론상으론 절반 미만이어야 하지만 자기를 과신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자기 능력을 매우 냉정하게 평가한 집단이 있었다고 한다. 정신병원에서 중증 우울증을 치료받는 집단이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삶에 의욕을 잃고 우울증을 앓게 되는 모양이다.

    성공하면 우쭐, 실패하면 불운 탓?

    공주병이나 왕자병 수준이 아니라면, 적당한 자기 과신은 현대인의 삶에 활력소가 될 듯하다. 그러나 과신이 투자에서는 금물이다. “바보들은 성공하면 자기 실력에 우쭐하고, 실패하면 불운을 탓한다”라는 말이 있다. 초보자의 성공은 흔히 불행의 씨앗이 된다. 운 좋게 몇 번 성공한 초보자는 대부분 자기 능력을 확신하고, 판돈을 과감하게 키워나간다. 그러다가 번 돈의 몇 곱절을 날린다. 이쯤에서라도 정신을 차리면 다행이다. 잃어버린 본전을 찾으려고 저축에 손을 대고 대출을 받기 시작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과신은 당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적이며, 금융회사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다. 당신이 운 좋게 돈을 벌었을 때 금융회사 직원이 당신의 실력을 칭송한다면, 그 직원은 당신의 야성적 본능을 이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수 법칙’은 표본 몇 개에 나타나는 특징을 과장해 받아들이는 경향을 말한다. 즉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행태다. 예를 들어, 단기간에 화끈한 실적을 올린 펀드에 투자자금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투자설명서에는 분명히 굵은 글씨로 “과거의 투자실적이 미래에도 실현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 경고문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투자자가 거듭 저지른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글은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단기간에 화끈한 실적을 올린 펀드는 대부분 얼마 안 가서 실적이 저조해지면서 평균으로 수렴한다.

    공모주 청약, 주가연계증권(ELS), 주식워런트증권(ELW)에 대해 사람들은 소수 법칙에 빠지기 쉽다. 최근에 나타난 성공 사례 몇 건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일쑤다. 미국에서 공모주 청약을 장기간 분석한 바로는 투자실적이 주가지수 상승률에도 크게 못 미쳤다. 기업을 공개하는 회사는 당연히 주가를 최대한 높이려고 한다. 그래서 시장 여건이 유리할 때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발행한다. 공모주 업무를 대행하는 금융회사는 공개하는 회사 편을 들까, 아니면 개인투자자 편을 들까.

    상투를 잡는 ‘야성적 본능’ 행동재무학이 밝혀내다
    당연히 비싼 수수료를 듬뿍 주는 회사 편을 든다. 금융회사의 특기 중 하나는 탁월한 포장능력이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삼류 회사도 전도유망한 우량 회사로 근사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다. 개미투자자는 흔히 소수 법칙에 빠지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그래서 투자 거장들은 한결같이 공모주에 투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ELS나 ELW도 한두 건의 실적이 아니라 과거 장기간의 실적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필자는 ELS나 ELW의 장기 실적 분석자료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이들의 장기 실적이 실제로 매력적이라면, 포장능력이 탁월한 금융회사들이 이미 근사한 보고서로 만들어 널리 뿌리지 않았을까.

    * 이건은 은행에서 펀드매니저로 국내 주식과 외국 채권 및 파생상품을 거래했고, 증권회사에서 트레이딩 시스템 관련 업무도 했다. 지금은 주로 투자 관련 고전을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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