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국제정치학의 거장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세계 일등 지위를 굳히려는 미국의 유라시아 공략 전략 지침서’라고 주장하며 1997년 펴낸 책의 제목이다. 감히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하는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21세기에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를 두고, 그는 흡사 체스판을 앞에 둔 고수처럼 대륙 전체에 걸친 세계 경영의 비책을 한눈에 묘파한다.
‘제2열도선’까지 중국의 공격적 행마
브레진스키의 지정학적 시선을 잠시 빌리자면, 최근 수년 사이 우리가 목격하는 중국의 행보는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넘어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체스판처럼 내려다보며 펼치는 공격적 행마 그것이다. 일본, 대만, 필리핀, 난사군도(南沙群島)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1열도선’이라는 종래의 한계를 넘어 일본 남단에서 괌으로,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어지는 ‘제2열도선’까지 해군력의 활동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난사군도와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에서 지난해 중국이 밀어붙인 강도 높은 긴장 분위기는 이 공간이 자기 것임을 선언하려는 수순이었다.
8월 10일 시험 항해에 나선 중국의 첫 항공모함 바랴크에 전 세계가 주목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원정작전에 사용하는 ‘대양해군(大洋海軍)’의 전초기지 항공모함은 지정학적 세력권 확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가상적국 수도를 전략적으로 공습할 수 있는 스텔스기 개발, 서태평양까지 타격 범위에 포함하는 ‘항공모함 킬러’ 탄도미사일 개발은 지금 이 바다를 지배하는 미국을 노려보며 종횡무진 체스판을 누비는 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이를 지켜보는 미국의 호흡은 가쁘기 이를 데 없다. 터져 나온 재정적자 문제와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워싱턴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 온 세계를 뒤덮은 2011년 8월, 백악관은 향후 10년간 최대 85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국방예산 삭감을 결정했다. “역사상의 모든 강대국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 때문에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폴 케네디의 우울한 예언이 못내 불안한 워싱턴 지도자들은 이제 해외 미군기지를 예의 주시한다. ‘보호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청구서가 동맹국들의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세력 확장은 북한을 비롯한 ‘불량 정권’과의 위험한 네트워크 덕분이므로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동맹국을 연결해 대(對)중국 포위망을 구축해야 한다.” 미 하원 외교위원장 일레나 로스-레티넨이 ‘신동아’ 2010년 12월호 인터뷰에서 한 이 발언은 최근 상황에 대한 워싱턴 보수층의 ‘현실주의적 비관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새로운 냉전이며, 따라서 구(舊)소련에 취했던 봉쇄정책을 중국에도 실행해야 한다는 인식.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아니 이미 부상한 중국에 대항해 미국 우위를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욱 강력한 동맹라인을 전 세계에 걸쳐 조직하는 것뿐이다.
지난해 11월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사상 최초로 참가한 서해 한미합동훈련과 12월 미군 1만여 명, 함정 20척, 항공기 150기가 참가한 오키나와 인근 해역의 미일합동훈련은 가장 첨예한 긴장선이 그어진 바다에서 이를 군사적 실체로 보여주려는 워싱턴의 ‘멍군’이었다. 제국의 쇠퇴를 인정할 수 없는 지난 세기 지배자의 노익장이었다. 그렇게 지구가 생겨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한 군사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밀도로 이 바다를 메워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더욱 가혹한 사실 하나. 한반도는 바로 이 대립 공간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를 가장 빨리 읽어낸 것은 서울이 아닌 평양이다. 천안함 사건이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평양은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어깨들의 힘겨루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도 정확히 계산해냈다. 연평도 포격에 숨어 있는 뜻은 자신이 언제든 이 바다를 분쟁 최전선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과시였다. 새로운 대립 전선이 두터워지면, 옛 냉전시절 소련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했듯 중국의 등 뒤에 숨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으리라는 속내였다.
중국은 6월과 7월 이어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 선박 인양작업을 해온 한국 예인선에 관공선을 잇따라 보내 작업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5월 25일 북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진항을 이용한 중국의 한반도 동해 출해권(出海權) 문제를 마무리했다.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는 이제 한국의 남방해역과 동해를 모두 쓸어 담는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중화(中華) 세력권은 이미 한반도를 넘어서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래 한국에는 두 갈래 선택지가 있다. 먼저 미국이 내민 손을 더 힘주어 맞잡아 중국 견제에 동참하는 이른바 ‘강대강(强對强)’ 전략. 멀리 떨어져 영토적 야심이 없으므로 가까운 상대를 제어하는 데 긴요하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이점은 21세기 미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요약되는 60여 년 동맹국의 동질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선택을 위해서는 장차 동아시아에서 미국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하고,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체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도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바야흐로 군비경쟁의 시대다. 더욱이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베이징이 흔들어댈 경제 문제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미래 한국의 앞에 놓인 2개의 선택지
다른 하나는 떠오르는 신흥강자에게 구애의 눈짓을 보내면서 옛 연인과 서서히 거리를 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전략. 어느 쪽도 분노하거나 돌아서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가 되는 까마득한 선택이다. 그러나 실망한 미국이 그간 북한 위협을 함께 고민해온 동맹의 미래와 주한미군의 지위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기 쉽지 않고, 강해질 중국의 입김이 한국에 얼마나 가혹한 요구를 강요할지도 선뜻 상상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이는 한국의 다가올 100년을 좌우할 역사적 선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쟁에 ‘중국’이 키워드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이 시험문제를 받아들고 서 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중국과의 긴장 우려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질문의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권적 결정사항을 두고도 논란이 정치권까지 번지는 지금의 상황은 중국의 세력 확대가 이제 한국의 고유한 정책 이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음을 의미한다. 20년 전만 해도, 아니 10년 전만 해도 한국군 기지를 건설하면서 중국을 생각하는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더욱 아찔한 것은 이는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석학들은 중국이 온 세계를 통틀어 미국과 맞서는 나라가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국과 미국이 반드시 대립하리라고는 볼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동북아는 두 강대국의 세력 구도 변화가 가장 급속히 진행되는 지역이고, 어떤 식으로든 중국의 대(對)한반도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으며, “한미동맹은 지난 세기의 유물”이라는 베이징의 질시 또한 빠른 속도로 노골화할 것이다. ‘주변 4강이 세계 4강’이라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만을 탓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미 펼쳐진 동중국해의 날카로운 체스판 위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신(神)의 한 수’는 과연 무엇인가.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제2열도선’까지 중국의 공격적 행마
브레진스키의 지정학적 시선을 잠시 빌리자면, 최근 수년 사이 우리가 목격하는 중국의 행보는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넘어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체스판처럼 내려다보며 펼치는 공격적 행마 그것이다. 일본, 대만, 필리핀, 난사군도(南沙群島)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1열도선’이라는 종래의 한계를 넘어 일본 남단에서 괌으로,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어지는 ‘제2열도선’까지 해군력의 활동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난사군도와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에서 지난해 중국이 밀어붙인 강도 높은 긴장 분위기는 이 공간이 자기 것임을 선언하려는 수순이었다.
8월 10일 시험 항해에 나선 중국의 첫 항공모함 바랴크에 전 세계가 주목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원정작전에 사용하는 ‘대양해군(大洋海軍)’의 전초기지 항공모함은 지정학적 세력권 확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가상적국 수도를 전략적으로 공습할 수 있는 스텔스기 개발, 서태평양까지 타격 범위에 포함하는 ‘항공모함 킬러’ 탄도미사일 개발은 지금 이 바다를 지배하는 미국을 노려보며 종횡무진 체스판을 누비는 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이를 지켜보는 미국의 호흡은 가쁘기 이를 데 없다. 터져 나온 재정적자 문제와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워싱턴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 온 세계를 뒤덮은 2011년 8월, 백악관은 향후 10년간 최대 85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국방예산 삭감을 결정했다. “역사상의 모든 강대국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 때문에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폴 케네디의 우울한 예언이 못내 불안한 워싱턴 지도자들은 이제 해외 미군기지를 예의 주시한다. ‘보호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청구서가 동맹국들의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세력 확장은 북한을 비롯한 ‘불량 정권’과의 위험한 네트워크 덕분이므로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동맹국을 연결해 대(對)중국 포위망을 구축해야 한다.” 미 하원 외교위원장 일레나 로스-레티넨이 ‘신동아’ 2010년 12월호 인터뷰에서 한 이 발언은 최근 상황에 대한 워싱턴 보수층의 ‘현실주의적 비관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새로운 냉전이며, 따라서 구(舊)소련에 취했던 봉쇄정책을 중국에도 실행해야 한다는 인식.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아니 이미 부상한 중국에 대항해 미국 우위를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욱 강력한 동맹라인을 전 세계에 걸쳐 조직하는 것뿐이다.
지난해 11월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사상 최초로 참가한 서해 한미합동훈련과 12월 미군 1만여 명, 함정 20척, 항공기 150기가 참가한 오키나와 인근 해역의 미일합동훈련은 가장 첨예한 긴장선이 그어진 바다에서 이를 군사적 실체로 보여주려는 워싱턴의 ‘멍군’이었다. 제국의 쇠퇴를 인정할 수 없는 지난 세기 지배자의 노익장이었다. 그렇게 지구가 생겨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한 군사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밀도로 이 바다를 메워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더욱 가혹한 사실 하나. 한반도는 바로 이 대립 공간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를 가장 빨리 읽어낸 것은 서울이 아닌 평양이다. 천안함 사건이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평양은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어깨들의 힘겨루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도 정확히 계산해냈다. 연평도 포격에 숨어 있는 뜻은 자신이 언제든 이 바다를 분쟁 최전선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과시였다. 새로운 대립 전선이 두터워지면, 옛 냉전시절 소련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했듯 중국의 등 뒤에 숨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으리라는 속내였다.
중국은 6월과 7월 이어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 선박 인양작업을 해온 한국 예인선에 관공선을 잇따라 보내 작업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5월 25일 북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진항을 이용한 중국의 한반도 동해 출해권(出海權) 문제를 마무리했다.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는 이제 한국의 남방해역과 동해를 모두 쓸어 담는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중화(中華) 세력권은 이미 한반도를 넘어서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래 한국에는 두 갈래 선택지가 있다. 먼저 미국이 내민 손을 더 힘주어 맞잡아 중국 견제에 동참하는 이른바 ‘강대강(强對强)’ 전략. 멀리 떨어져 영토적 야심이 없으므로 가까운 상대를 제어하는 데 긴요하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이점은 21세기 미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요약되는 60여 년 동맹국의 동질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선택을 위해서는 장차 동아시아에서 미국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하고,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체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도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바야흐로 군비경쟁의 시대다. 더욱이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베이징이 흔들어댈 경제 문제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미래 한국의 앞에 놓인 2개의 선택지
다른 하나는 떠오르는 신흥강자에게 구애의 눈짓을 보내면서 옛 연인과 서서히 거리를 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전략. 어느 쪽도 분노하거나 돌아서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가 되는 까마득한 선택이다. 그러나 실망한 미국이 그간 북한 위협을 함께 고민해온 동맹의 미래와 주한미군의 지위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기 쉽지 않고, 강해질 중국의 입김이 한국에 얼마나 가혹한 요구를 강요할지도 선뜻 상상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이는 한국의 다가올 100년을 좌우할 역사적 선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쟁에 ‘중국’이 키워드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이 시험문제를 받아들고 서 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중국과의 긴장 우려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질문의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권적 결정사항을 두고도 논란이 정치권까지 번지는 지금의 상황은 중국의 세력 확대가 이제 한국의 고유한 정책 이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음을 의미한다. 20년 전만 해도, 아니 10년 전만 해도 한국군 기지를 건설하면서 중국을 생각하는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더욱 아찔한 것은 이는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석학들은 중국이 온 세계를 통틀어 미국과 맞서는 나라가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국과 미국이 반드시 대립하리라고는 볼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동북아는 두 강대국의 세력 구도 변화가 가장 급속히 진행되는 지역이고, 어떤 식으로든 중국의 대(對)한반도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으며, “한미동맹은 지난 세기의 유물”이라는 베이징의 질시 또한 빠른 속도로 노골화할 것이다. ‘주변 4강이 세계 4강’이라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만을 탓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미 펼쳐진 동중국해의 날카로운 체스판 위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신(神)의 한 수’는 과연 무엇인가.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