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1

2011.08.22

윤이상 부인과 딸 평양서 잡화점 운영

중국 공산품 등 들여와 평양 시민에 팔아…수익은 윤이상음악연구소 유지 비용에 충당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8-22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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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부인과 딸 평양서 잡화점 운영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구권과 신권을 10대 1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에 나섰다. ‘자본주의 시장’을 억누르고 ‘사회주의 계획’을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시장을 묵인했다. 나랏돈은 선군이 상징하듯 안보에 집중하고 먹는 문제는 시장에 방임했다.

    북한이 ‘시장’을 윽박질러 ‘계획’을 회복하는 반(反)개혁에 나선 날, 작곡가 윤이상(1917~95) 씨의 부인 이수자(84·사진) 씨와 딸 정(61) 씨는 분주했다. 다른 상인들도 난리가 난 듯 물건을 숨기거나 나르느라 바빴다. 당국이 상점을 조사하고 물건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윤씨 가족도 밤시간대를 이용해 물건을 치웠다. 이씨는 “화폐개혁 탓에 난리가 났다”고 지인에게 말했다.

    이씨와 딸은 평양에 살면서 장사를 한다. 북한 당국이 평양 도심에서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집을 내주었다. 딸은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 후원회장, 한국 윤이상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 북한, 독일, 미국을 오가면서 생활한다.

    윤씨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음악가.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이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국문과를 다녔다. 국어교사로 일하다 1950년 결혼해 독일로 이주했다.

    윤씨 가족이 사회주의 독재, 폐쇄경제에 집착해 몰락한 북한에서 ‘자본주의식 장사’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들 같은 특수 계층마저 장사에 나설 만큼 북한은 시장화했다.



    휴대전화 액세서리가 인기 상품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무너지면서 북한은 시장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대북 지원, 대(對)중 무역 덕분에 국영공장을 재가동하면서 시장 영역을 국가가 흡수하고자 단행한 게 화폐개혁이다. 북한은 윤씨 가족에게 적지 않은 혜택을 줬다. 그럼에도 장사로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은 뭘까. 북한은 1984년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는 민족음악연구실, 출판사, 공연관리부서로 나뉘어 있다. 600석 규모 공연장도 갖췄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가 추락하면서 북한 당국의 지원이 줄었다.

    이씨는 “장사로 돈을 벌어 윤이상음악연구소 운영에 보탠다”고 지인에게 말했다. 당국이 설립한 연구소마저 장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것이다.

    윤씨 가족이 하는 장사는 잡화점. 중국산 공산품 등을 들여와 판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는 이는 딸로, 평양 부유층을 중심으로 휴대전화 보유가 늘면서 요즘엔 휴대전화용 액세서리가 잘 팔린다고 한다.

    화폐개혁을 통해 계획경제를 회복해보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강했다. 특수 계층도 물건, 외국 돈(위안, 달러)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시장은 힘이 셌다. 북한 민간경제를 지탱하는 건 중국산 공산품, 중국 화폐 위안이다.

    화폐개혁이 실패하면서 시장은 되돌아왔다. 이씨는 올해 평양을 찾은 지인에게 “상점에 한 번 놀러와”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시장이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윤씨 가족의 의견을 듣고자 윤이상평화재단을 통해 접촉했으나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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