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8

2011.03.14

인간에 대한 타는 목마름 ‘인문학 바다’로 풍덩

소설가 고승철의 ‘인문학 공부 편력기’

  • 고승철 소설가 koyou33@empas.com

    입력2011-03-14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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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 대한 타는 목마름 ‘인문학 바다’로 풍덩
    1970년대, 엄혹한 독재정부 시절이었다. 자유보다는 빵이 소중하다고 강요하던 시기였다. 그럴수록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 시기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닌 필자는 인문학이 뿜어내는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질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선거로 뽑지 않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란 사람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선출했다. 어린 고교생이지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길고 긴 훈화에서 “통일을 위해 필요한 대통령의 영단”이란 취지로 학생들을 설득했고, 친구들은 대부분 곧이곧대로 믿었다.

    답답했다. 감수성이 예민했는지 대학 입시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무렵 ‘문학사상’이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문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품격 높은 잡지였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 이어령 선생의 무변광대(無邊廣大)한 평론이 시골뜨기 고교생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웠다. 외국 문학계 동향을 훑어보며 무채색의 한국과 달리 알록달록한 피안(彼岸)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대학생이 되니 주변에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란 잡지가 자주 눈에 띄었다. 흔히 ‘창비’ ‘문지’로 불렀던 이 잡지는 현실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아 젊은이들을 흡인했다. 이 잡지들을 애독하면서 학교에서 이런저런 인문학 과목을 수강했다. 교수진은 화려했다. 교양 영어를 맡은 황동규 교수는 시인이자 소설가 황순원 선생의 아들로 유명한 분이었다. 교양 불어의 김광남 교수는 ‘김현’이란 필명의 쟁쟁한 문학평론가. 한국사를 강의한 김철준 교수는 한국고대사 분야의 석학이었다.

    시골뜨기 고교생 영혼을 일깨운 잡지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필자는 인문학 공부에 재미를 들여 경영학과 전공필수 과목 이외엔 주로 인문학 강좌를 들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의 ‘문학의 이해’라는 명강의를 듣고 문학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았다. 역사와 문학의 차이를 듣고 그 명쾌한 설명에 무릎을 쳤다. 역사는 특수한 사건 당사자의 행위를 기록한 ‘특수성’을 지니지만 문학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보편성’을 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단다. 그래서 허구인 문학이 사실인 역사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가공(架空)의 진실’이란 말의 뜻을 깨달았다.



    ‘꺼삐딴 리’라는 유명한 단편소설을 쓴 작가 전광용 교수에게서 한국 현대소설 강의를 들었다. 사르트르에 관한 국내 최고 전문가인 정명환 교수, 바슐라르 전문가인 곽광수 교수의 불문학 수업을 수강했다. 그들은 당대의 석학인데도 젖비린내 풍기는 학부생의 하찮은 질문에 진지하게, 성심성의껏 답변해주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취업과 함께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결혼 이후 이사를 몇 번 다니면서 정기구독하며 모은 잡지와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서적을 버렸다. 경제부 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경제·경영 서적을 읽었다. 최고의 경영 성과를 내는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떠올랐다. 소설가가 골방에 쪼그리고 앉아 지어낸 사(私)소설류의 작품은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듯했다. 철학은 공허했고 역사는 승자의 무용담이라는 인식이 들었다.

    그러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경제·경영학 지식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분야에 전문가가 그렇게 많건만 제대로 위기를 예견한 사람이 없었다. 2008년 여름에도 그랬다. 세계적 경제위기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이었음이 드러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수식으로 경제 현상을 설명한 정통파 학자보다는 인간 심리를 연구한 비주류 학자가 잇따라 경제학상을 받았다.

    경제·경영 한계 절감 … 고전 읽을수록 재미 쏠쏠

    필자의 관심도 변했다. 인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면서 다시 인문학에 탐닉하고 싶어졌다. 어느 문화센터에 개설된 고전강독 강좌에 참여했다. 재야 철학자 강유원 박사가 진행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읽기 강좌였는데 강사의 열정, 수강자들의 진지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인문학 공부에 재미를 붙여 서울대 인문대의 최고지도자과정(AFP)에 등록해서 6개월간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AFP 주임교수들의 학식과 인품에도 감화됐다. 국사학자 이태진 교수(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논어’ 분야의 권위자인 이강재 교수, 고대 오리엔트 종교학의 대가인 배철현 교수 등이 그분들이다. 대부분이 저명인사인 AFP 졸업 동기생들은 “인사불성!”이라는 건배사를 외친다. ‘인문학을 사랑하면 불가능도 성공으로!’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언어감각이 탁월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만들었다.

    AFP를 마친 뒤 동기생들은 ‘공부 중독’에 빠져 ‘계영계(戒盈契)’라는 동아리를 결성해 몇 년째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중국 철학, 그리스 철학, 대항해 시대, 이집트 문명, 한문 명문장 등을 해당 분야의 권위자에게서 배웠다. 올 상반기에는 노자, 장자를 탐구할 예정이다.

    필자는 직장생활에서 물러난 후 대중을 위한 여러 인문학 강좌에 부지런히 참여한다. ‘수유+너머’라는 특이한 이름의 연구소가 개설한 강좌와 세미나의 단골 학생이다. 여기서 의역학(醫易學)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익히기도 했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벽초 홍명희의 10권짜리 소설 ‘임꺽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듣는 강의는 무척 흥미로웠다. 이 강의에서 모티프를 얻어 필자는 ‘은빛 까마귀’라는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수유+너머에서 곰숙, 문탁, 채운, 문리스, 도담 등의 닉네임으로 불리는 강사들에게서 그들의 내공을 전수받는다. 지금은 1년 동안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는 ‘대중 지성’이라는 과정과 미술사, 미학을 토론하는 세미나에 동참하고 있다.

    ‘문지문화원 사이’라는 곳에서 문학 고전 강좌도 수강했다. 소설가 겸 러시아문학 전문가인 김연경 박사가 진행하는 강좌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파우스트’ ‘성(城)’ ‘페스트’ 등 불후의 명작을 읽고 토론했다. 혼자서는 읽기에 벅찬 두툼한 책을 토론 준비용으로나마 독파하고 나니 스스로 뿌듯해졌다.

    필자는 기업체나 사회단체에 강사로 여러 번 초청받았다. 강의 주제는 주로 ‘인문학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다. 몇 달 전 이사를 하면서 서재에 잔뜩 쌓였던 경제, 경영 서적을 버렸다. 도요타자동차의 경영시스템에 관한 자료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경영 지식의 생명은 너무 짧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2500여 년 전 플라톤이 쓴 ‘국가론’이 요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의 원조 격이라는 사실을 알면 인문학의 오랜 생명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삶, 사랑, 죽음 등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가장 절실하게 품는 인문학 화두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인문학의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기꺼이 몸을 던지련다.

    * 1954년 출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동아일보 경제부장 및 출판국장 역임

    * 저서 : 장편소설 ‘은빛 까마귀’ ‘서재필 광야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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