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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일상으로 오다 인문학 新열풍 03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초심자 위한 인문학 강좌 맛보기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5년 전쯤 싹을 틔운 인문학 미풍(微風)이 태풍(颱風)으로 치닫고 있다. 서점가에 비치된 ‘000 인문학’만 수십 종. 대안 인문 공간뿐 아니라 대학과 지방자치단체도 경쟁하듯 대중 인문학 강의를 선보인다. 이쯤 되면 인문학 모르고 잘 먹고 잘 살던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이런 생각을 할 법하다. ‘가까운 곳에서 하는 인문학 강의, 나도 한번 들어볼까?’

하지만 선뜻 인문학과 첫인사를 트기란 쉽지 않다. ‘시간낭비가 아닐까’ ‘교실과 담 쌓은 세월이 얼만데 어색하진 않을까’. 괜한 걱정과 어색함에 관심을 접기 일쑤. 무엇보다 무슨 강의를 들을지 막막하다. 이럴 때는 스테디셀러 강의부터 살피는 것이 정석.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 앞에서 눈이 뱅뱅 도는 심정으로 주요 대안 인문 공간에 물었다. “꾸준한 인기 강의 좀 추천해주세요.”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다중지성의 정원’ ‘KT·G 상상마당’ ‘독서대학 르네21’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시민예술학교’ ‘예술의전당 예술아카데미’ 등에 문의한 결과를 토대로 인기 강의 목록을 꾸렸다. 그중 취재 시기가 맞되 기자 개인이 관심 있는 강의를 추렸다. ‘철학아카데미’와 ‘수유+너머’는 일정상 강의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인문학 강의뿐 아니라 사진, 영상, 사운드 등 트렌디한 강의가 다수 개설된 ‘KT·G 상상마당’에서는 2개의 강의를 들었다.

“잊고 있던 학구열에 불붙은 기분이다.” “강의 듣다가 코 골 뻔했다.” “비워내는 취재만 하다가 채우는 취재를 하니 뿌듯하다.” “나한테 질문할까봐 살 떨렸다.” 기자 4명의 청강 후기는 제각각. 하지만 모두들 비밀을 숨긴 소년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초심자를 위한 ‘인문학 맛보기 가이드’를 소개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journalog.net/tianmimi



잘 읽고 잘 떠들었는데 저마다 글쓰기 실력이 쑥

‘수상한 냄새’가 났다. 3월 7일 오후 7시 20분, 서울 마포구 동교동 KT·G 상상마당의 한 강의실. 강의 시작 10분 전 수강생이 속속 도착했지만 서로 간단한 인사만 나눌 뿐 각자 책읽기에 바쁘다. 삭막한 분위기에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고민하는 사이 강사 이권우(48) 씨가 들어왔다. 이씨가 “책 좀 어렵게 읽었느냐”는 인사말을 던지자 다들 고개를 들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글쓰기 강의 ‘수상한 독서클럽’은 책을 읽고 그 책을 소재로 글을 써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회생활에 쫓기는 수강생들은 수업 시작 전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려고 애를 쓴다.

이날 제8강 수업 교재는 역사학자 오항녕 씨가 지은 ‘조선의 힘’이다. 이씨는 “500년을 버틴 조선이란 나라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라며 책의 안팎 배경지식과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일방적 강의는 여기서 끝. 이제부터는 수강생들이 이끌어나갔다. 호텔 홍보실 직원, 직업 모델, 구청 세무과 직원,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수강생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강의실에 도착한 뒤에야 몇 장 읽은 수강생부터 바쁜 시간을 쪼개 대부분을 읽고 온 수강생까지, 책을 읽은 분량은 다양했지만 저마다 할 말이 많았다.

2장까지 읽어 온 수강생은 “줄까지 치며 열심히 읽었다. 어려울까 겁먹었는데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했던 조선의 내면을 볼 수 있어 재밌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유학과 관련된 책을 더 읽어보라. 책을 많이 읽으면 기존에 읽었던 책도 다시 보이고 깊이도 더할 수 있다”며 몇 권의 책을 추천했다. 그는 책을 함께 읽으며 “지적 혼란이 일어난다”고 호소하는 수강생에게도 “더 깊이 빠져보라”며 독서욕을 이끌어냈다.

수강생들이 각자의 감상을 털어놓는 시간 동안 여러 번 웃음이 터졌다. 자신이 미처 못 본 부분을 다른 수강생을 통해 찾은 발견의 희열과, 같은 부분에 시선이 머문 공감의 기쁨 덕분이다. 감상을 나누는 시간은 무척 중요하다. 이씨는 “말문이 트여야 글문이 트인다. 어떤 글을 쓸지 말할 때 글 쓰는 일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자발적으로 교양과 지식의 결핍을 채우고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한 수강생은 1기부터 4기까지 1년가량 이 수업을 들었다. 이 수강생은 “좋아하거나 필요한 책만 읽으며 편식했는데, 독서 가이드를 받으니 시행착오를 줄여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다”며 강좌를 추천했다. 주 1회 수업, 10강에 20만 원.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수상한 독서클럽’ 이권우 씨

지적 갈증 채우기 ‘자발성의 힘’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죽도록 책만 읽는’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등. 자타 공인 한국을 대표하는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저작이다. 그는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한 뒤 안양대 교양학부 강의교수로 일했다. 대학 공간을 박차고 나온 뒤 대중을 대상으로 ‘전작주의’ ‘겹쳐 읽기’ ‘느리게 깊이 읽기’ 등 독서법과 글쓰기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있다.

▼ 책을 어디까지 읽어 왔는지 꼼꼼하게 묻던데?

주로 젊은 직장인이 수강하는데, 이들은 책읽기를 멀리하는 젊은 세대, 바쁜 직장인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책읽기가 좋은 걸 알지만 일 부담 때문에 읽지 못하는 이들이기에 어느 정도 강제성을 주고 있다. 읽지 못한 부분에서 꼭 찾아볼 부분을 일러주는 것도 바쁜 일상에 대한 배려다. 수업 서두에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배경 설명은 책을 읽고 온 사람에게는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하고 안 읽은 사람에겐 책에 전제된 관점을 알고 읽게 해주기 때문이다.

▼ 대중인문학이 나아갈 길은?

우리 사회는 인간을 ‘기능에 충실한 밥그릇’으로 만들어왔다. 이제는 양, 물질에서 행복, 가치, 성찰을 담는 질적 변화를 꾀할 때다. 나라나 사회가 이 일을 해야 했는데 사람들이 대중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다니면서 자발적으로 이런 문화와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제는 공공영역에서 보도블록만 깔 게 아니라 그 돈으로 대중인문학 강의를 늘리는 상상을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문학자에게도 꼭 대학 안이 아니라 대학 밖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 수강생들의 실력이 정말 늘어나나.

자발성의 힘이 대단하다.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대학생과 자세가 다르다. 또 삶의 경험, 고민에서 쌓인 교양이 잠재된 수준도 높다. 지적 갈증을 느끼고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이 찾아오기에 실력들이 빠르게 늘어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국내 詩와 철학자 연결 무릎 탁 치는 사유의 여행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현대인의 절망 의식을 자주 다룬 것으로 유명한 김종삼(1921~1984) 시인의 1953년 등단 작품 ‘원정(園丁)’을 낭독하던 강사 강신주(43) 씨. 차분하게 시를 읽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시인의 정서를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 손 들어봐요. 자기가 세상의 온갖 불행을 몰고 오는 것 같다는 사람 있잖아요. 김종삼은 멀쩡한 것도 자기가 집기만 하면 썩어간다고 하죠. 어떤 느낌인지 알겠죠?”

가슴에 딱 와닿는 강사의 언변에 수강생들이 연방 고개를 끄덕인다. 수강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0, 30대 여성은 저마다 시에서 받은 느낌을 얘기한다.

“약간은 저하고도 통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뭐든 잘못될까봐 애써 피하고 싶고, 뭐 그런 감정?”

“정말 공감해요. 저는 물건 살 때마다 문제가 있는 제품이 배달돼요. ‘이제 시를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드네요.”

‘KT·G 상상마당’의 금요일 저녁 인문학 강좌인 ‘철학과 놀기’의 강의실은 이처럼 매주 시끄럽다. 시를 하나 골라 특정한 단락이나 문구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데, 그 과정에서 강사와 수강생이 혼연일체가 된다. 강사와 수강생은 시에서 느낀 감정을 안고 외국의 한 철학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강좌가 왜 ‘철학과 시가 부르는 사유의 노래’인지를 알아챌 수 있다. 강씨는 국내 시와 외국의 철학자를 절묘하게 연결하면서 강의를 재개한다.

“‘집기만 하면 썩어간다’는 구절에서 전 블랑쇼가 떠올라요. 그는 죽음을 정복하는 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블랑쇼는 ‘인간이란 바깥(죽음)과 직면할 때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해했던 사람이죠. 그렇다면 김종삼 시인이 시에서 드러낸 자괴감이 이해가 갑니까?”

프랑스의 소설·철학 평론가인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문학을 인간 존재의 ‘깊은 곳’을 탐구하는 행위로 파악하고 끊임없이 죽음과의 접근을 시도한 인물이다. 수강생들은 유명한 그의 ‘존재론’ 강의를 들으면서 이미 시인 김종삼이 돼 있다. 그러고는 금세 시인의 시가 ‘존재론’보다 더 예리하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여러분, 아름다운 여인을 보다가 늙어가는 여인을 보면 더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거, 뭔지 알죠. ‘아주 쿨한’ 김종삼 시인의 의식이 이해 가나요?”

수강생들은 다시 끝없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주 1회 수업, 10강에 20만 원.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철학과 놀기’ 강신주 씨

시의 보편성, 철학의 개념 함께 이해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연애, 시련, 죽음 이런 것에 대한 철학적 문맥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선 어떤 논리도, 진리도 전부 답이에요. 이것을 갖고 놀면서 상처가 나도 자신을 치유할 수 없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철학, 삶을 만나다’의 저자로 동아일보에 ‘철학으로 세상읽기’를 연재하는 강신주 씨는 삶의 전 과정에 필요한 만병통치약으로서의 철학을 강조한다. 그는 철학을 쉽게 삶으로 투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로 시를 택한다. 철학과 시가 어우러진 강의가 탄생한 계기다.

▼ 왜 철학과 시인가.

“철학적 문맥을 제공하는 데 시를 함께 선택한 것은 시인의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바다를 본다면 시인은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 밑을 본다. 즉, 주관적인 판단을 하고 객관적인 성찰을 한다. 철학자는 바다를 보면 먼저 육지에서 그물을 만든다. 물고기를 잡고 그물코의 이상 유무를 살핀다. 그런 다음 ‘이거다’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것을 ‘크로스’시키는 것이다. 시의 보편성, 철학자의 개성과 시선을 함께 이해하자는 것이다.”

▼ 강의 도중 자기 고민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수강생이 많다.

“자기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난 과감하게 고민을 드러내라고 말한다. 그렇게 얘기하면 상처가 객관화된다. 그럼 냉정하게 고민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다.”

▼ 인문학이 열풍이지만, 뒤에서 반성하는 인문학자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시인은 있지만 우리 철학자는 없다. 외국 철학을 들여다가 남 얘기처럼 말하고, 그걸 암기시키고…. 넓게 보면 직업적 인문학자만 많았던 것이 위기를 부른 이유다. 반성해야 한다. 인문학자는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고민을 풀게 할 판을 만들어줘야 한다.”

먹고사니즘 잠시 내려놓고 한 달에 한 권 고전 읽기

“어, 이 수업 별거 없는데. 학생은 여기 왜 왔어? 학교를 가야지. 마을버스 타고 오는 사람들만 강의를 들을 수 있어요.”

강사 강유원(49) 씨가 입을 열자 수강생들의 웃음이 터졌다. 3월 8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강씨가 ‘강유원 박사의 인문고전 강의’ 첫 강의를 시작했다. 수강생 대부분은 집안일을 끝내고 온 주부지만, 학구열에 불타는 ‘빡빡머리’ 젊은 남성, 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젊은 여성도 눈에 들어온다. 멀리 경기 부천시에서 온 사람도 있다.

수강생은 한 달에 고전 한 권씩 강씨의 도움을 받아 읽어나간다. 강씨가 고전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 등을 짚어준다. 다루는 작품은 ‘일리아스’ ‘안티고네’ ‘니코마코스 윤리학’ ‘신곡’ 등. 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픈 고전이지만 정작 강의는 개그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그는 다양한 수준의 수강생을 때론 웃게 만들면서 어려운 고전의 세계로 능숙하게 인도했다. 그가 칠판에 ‘necessary and useful’이라고 쓴 뒤 강의의 목적을 힘주어 말했다.

“주부님들 이 강의 듣는다고 아이 논술에는 도움 안 돼요. 오직 내 인생 빛나게 하는 데 도움 될 뿐입니다. 이제는 먹고사니즘을 넘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마이크도 없지만 강씨 목소리는 울림이 컸다. 그의 말에 수강생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교재인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옮긴 ‘일리아스’의 책값은 3만3000원이다. 그는 “비싸면 안 사도 된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참여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야 한다. 결국 3만3000원 아끼려는 사람밖에 더 되겠느냐”고 했다.

본격적인 일리아스 강의에 들어갔다. 강씨가 2800여 년 전 트로이전쟁을 다룬 일리아스를 선택한 이유는 이 작품이 서양 문학의 출발점이기 때문. 그는 고전의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다가도 비유를 할 때는 확 치고 나갔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가리켜 “쉽게 말하면 양아치”라고 표현했다. 일리아스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할 책이라며 직접 큰 소리로 읽는 시범도 보여줬다.

강씨는 “이런 책이 있구나 알아만 둬도 좋다”고 겸손히 말했지만, 수강생들은 책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수강생 정덕화(37) 씨도 “수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좋은 선생님이 맥을 짚어주니 고전에 대한 부담도 줄었다”며 활짝 웃었다. 주 1회 수업, 4강에 2만 원, 수강 인원은 40명.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인문고전 강의’ 강유원 씨

사람 이야기 문제 제기만으로 충분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강유원 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강의, 글쓰기, 번역 작업을 통해 대중의 교양을 높이고 지식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 역시 직장생활을 하며 강단에 오르는 ‘회사원 철학자’였다. 개인 홈페이지에 철학 관련 자료도 공개한다.

▼ 일반 사람들이 고전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나

먹고사니즘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지면 하는 일이 없다. 인문학을 진정한 소프트웨어 산업이라 하는데, 이는 틀렸다. 단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고 또 사람의 한계가 어딘지, 살고 있는 영역이 과연 전부인지 묻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 주로 도서관에서 강연하는 이유는?

도서관은 무료거나 출석을 압박하는 수준의 돈만 받는다. 도서관 강연은 80명, 120명 대단위 규모다. 주부도 많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다. 무상복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밥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제 구청, 시청 등이 나서야 할 때다.

▼ 동네 양아치부터 인기 드라마까지 고전을 설명하며 드는 예시가 과감하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인문학자는 정작 사람에 관심이 없다. 주부들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고 “아들이 사귀는 여자를 못마땅해할 게 아니라 남자와 안 사귀는 것을 고마워하자”고 말한다. 실제 하는 이야기를 강의에 담는 것이다. 나도 ‘어려움의 골짜기’를 넘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강연에선 일단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발전과 이데올로기 어떤 관계를 맺어왔을까요?

“오늘 여러분이 읽어 오신 그람시의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의 정의, 정당 역할, 문화연합의 개념과 필요성 등에서 문제 제기하실 분 있나요?”

3월 8일 오후 9시 30분 서울 서교동 ‘다중지성정원’ 건물.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람시(1891~1937)의 철학을 강의하는 조정환(56,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 씨는 15㎡ 겨우 넘을 듯한 강의실에 모인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강생들은 이미 1시간 30분가량 그람시의 책 ‘옥중수고 이전’과 ‘옥중수고2’ 일부를 나눠 내용을 요약하고 발표한 상태다. 이날 강의 시간에 다루는 내용만 책 100쪽 분량은 족히 넘는다. 하지만 수강생들은 자기가 맡은 부분을 사전에 요약해보고, 강의 땐 전체 내용을 속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강의에선 ‘돌민’이라는 예명을 쓰는 한 남학생이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딱딱한 철학, 이데올로기 이론 수업을 받는 강의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다.

“행복해서 한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그람시가 지식인을 정의하는 부분이 정말 구절구절 마음에 들어서요. ‘지식인은 사회적 헤게모니와 정치적 통치의 하위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집단의 대리인이다’란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어요. 그런데 그람시가 이 점을 근거로 ‘국가기구는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동의하지 않는 집단을 합법적으로 징계하는 강제력을 행사한다’고 뽑아낸 구절을 보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습니다. 아, 행복해요.”

수강생들이 돌민 님의 ‘돌출’ 의견에 한바탕 웃었다. 조씨도 미소를 지으며 “그람시는 자신이 내린 정의와 이론을 세밀한 부분까지 확장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한 여성 수강자도 “조국 서울대(법학) 교수는 최근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읽는 책 가운데 그람시 저서가 있다고 말했어요”라고 받아쳤다.

그람시는 사회 발전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기계론적으로 철학을 적용하는 일을 무척 꺼렸던 이론가로 알려졌다. 다중지성의 정원 그람시 강좌의 방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수강생들이 그람시의 정서를 자유롭고 다양하게 끌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문필가, 과학자로 대표되는 전통적 지식인이 특수 사회계급의 두뇌이자 조직자인 유기적 지식인으로 이동하는 건 우리 시대에서도 큰 의미가 있어요. 음, 앵커를 하다 정당에 입문하거나 성직자가 직접 정치에 몸담는….”

현실과 어우러져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람시 강좌는 그날 밤 계속됐다. 주 1회 수업, 10강에 10만 원.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그람시’ 조정환 씨

혼란스러운 현실 극복 적응력 키울 것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그람시가 치열하게 했던 고민, 고뇌의 과정을 이해하면서 지금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얻는 기회라고 봅니다.”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이자 문학평론가인 조정환 씨에게 그람시 강의는 단순한 심화학습의 장이 아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를 진화시킨 그람시가 ‘실질적 포섭 시대’로 표현한, 즉 자본에 점점 ‘포섭되고’ 있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누구든지 극복할 수 있는 적응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그람시의 철학과 그의 저서는 분명 고전이지만, 현실의 해법이다. 이 때문에 조씨는 고전을 인문학 ‘정중앙’에 둔다.

▼ 인문학 열풍이 분다. 인문학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

“인문학 열풍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한 개인이 수많은 정보와 관계를 맺는 복잡한 상황에서 고전으로 사상의 혼란 상태를 벗어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 같은 대중지성의 시대에 고전을 접목해 사람들을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 학교가 아닌 대안 공간, 지성 공간에서 인문학 강좌가 활성화되고 있다.

“대학이 학생들의 취업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인문학이 가장 먼저 잘려나갔다. 인문학의 축소, 아니 포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학 외부의 공간이 그 몫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 인문학 열풍의 특징이 있다면.

“1999년, 2000년 들어 철학아카데미 강좌가 생겨나는 등 실험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이것이 음악, 예술 등과 연계돼 붐으로 번졌다. 학교에선 인위적으로 학문을 가르치려다 보니 강좌가 형식화됐다. 결국 수백만 원씩 등록금을 내며 수업을 듣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사람 모두 부담을 느꼈다. 이젠 정말 공부하려는 욕망이 있는 사람이 인문학을 찾는다. ‘학점 이수’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학문 자체가 어려워도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즐겨라’라는 명령요? 초자아가 내립니다

3월 4일 오후 6시 50분경.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복합문화공간 ‘문지문화원 사이’ 3층 강의실에 수강생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각기 자리를 잡은 뒤 가방에서 국어사전 두께의 책을 꺼냈다. 책 표지에는 ‘시차적 관점’이란 제목이 쓰여 있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은 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면서 책을 탐독했다.

강사 민승기(50) 씨의 ‘지젝 읽기: 시차적 관점’ 9번째 강의. 이날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시차적 관점’ 중 ‘정치적 범주로서의 주이상스(jouissance·쾌락)’ 부분을 강독하는 시간이었다. 민씨가 화이트보드에 ‘관용’이라는 글씨를 큼직하게 쓴 뒤 말문을 열었다.

“관용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커피를 마셔도 좋지만 카페인은 먹지 마라’ ‘콜라 중 다이어트 코크만 마셔라’ 같은 식이죠. 혁명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사상자 없이 혁명하겠다는 겁니다. 자유주의의 문제는 불가능성의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다양성으로 불가능성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계적 석학이다. 인문학 강의, 840여 쪽의 두툼한 책, 거기에 지젝까지. 저자가 라캉과 데리다를 불러다놓고 희롱하며 강의 내내 ‘젝젝거리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민씨는 적절한 비유를 섞어가며 강독 수업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텅 빈 공간’의 개념을 설명하고 구제역 이야기를 하며 ‘냉소주의’에 대한 설명을 해나갔다. 그가 다시 ‘초자아’ 개념을 설명했다.

“초자아는 우리에게 ‘즐겨라(Enjoy)’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 코카콜라를 사면 볼 수 있죠? ‘즐겨라’가 명령이 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래서 코카콜라가 자본주의 상품의 대표 격이고요.”

강의는 예정보다 길어져 밤 11시가 다 돼서 끝났다. 놀랍게도 졸거나 딴짓하는 수강생은 한 명도 없었다. 책 귀퉁이에는 하나같이 깨알 같은 글씨의 주석이 달렸다. 기자는 수업 내내 갈증을 느꼈다. 커피와 콜라 이야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가슴속의 텅 빈 공간을 인문학의 정수로 메우려는 욕구 때문이리라. 주 1회 수업, 10강 20만 원.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journalog.net/kooo

‘지젝 읽기:시차적 관점’ 민승기 씨

현실 속 결핍이나 저항 가능성 경계 탐색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나는 평생을 문학과 철학 사이에서 서성거려왔다”고 말했다. 민승기(50) 씨도 그 사이에서 긴 시간 ‘서성거려온’ 인물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인 그는 철학자 라캉과 데리다에 관심이 많다. 지금은 없어진 문예아카데미에서 2000년경부터 철학과 문학이론을 강의하며 인문학 강사로 나섰다. 그의 강의는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강독 수업이라 그전 수강자가 다시 듣기도 한다.

▼ 문화원에서 주로 어떤 수업을 해왔나.

지젝이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문학과 철학, 예술과 철학 등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사유를 이야기한다.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 자체가 탄탄하게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실 속의 결핍된 지점이나 ‘텅 빈 곳’, 현실에 저항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경계’를 탐색한다는 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 텍스트 강독 수업 방식을 택한 이유가 뭔가.

철학자가 뭘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텍스트를 통해 사유하는 방식, 읽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그를 통해 상품화될 수 없는 가치를 읽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일종의 텍스트다.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사유 방식을 길러야 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읽기를 통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느끼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 인문학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가치를 어떻게 보나.

우리 시대는 ‘왜’라는 질문이 생략된 시대다. ‘왜’라는 질문을 하면 멈춰 서야 하는데, 그러기에 현대인은 너무 바쁘다. 인문학은 ‘왜’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그러면 ‘중지’의 순간이 생기고, 그 순간이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어쩌면 혼돈이자 구원의 지점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럽지만 환희에 찬 이중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인문학의 효용성이다.

사라져가는 슬픔 구출 세월과 사진 속으로 순간 이동

“누군가의 존재, 빛바랜 인간관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생애 작은 고독이 있습니다. 순간순간 경험하거나 감각했지만 금세 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존재를 구출하는 게 바로 사진입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쾌한 설명, 일상을 휘젓는 날카로운 해석. 3월 3일 저녁 7시 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강사 김진영(59) 씨의 ‘사랑, 죽음, 그리고 사진’을 들으며 모호한 단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김 선생님 수업만 따라다니는 수강생도 있다”는 관계자 말이 이해가 갔다.

‘사랑, 죽음, 그리고 사진’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저서 ‘카메라 루시다’의 강독 수업. 김씨는 바르트의 지적 여정을 가로지르며 책에 담긴 함의를 삶 속에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카메라 루시다’는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사진 에세이로, 수강생 10여 명은 한 단어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강의에 몰입했다.

“사진은 시간의 포화상태입니다. 그때 그 시간이 그대로 사진에 꽉 들어차 있는 거죠. 바르트는 사진 속 어머니를 구출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데서 ‘깊은 슬픔’을 느끼죠. 사라지는 것을 붙들고 싶지만 실패하는 것은 현대인의 공통된 운명입니다.”

그의 설명에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구 사진을 쓰다듬던 일이 떠올랐다. 과거 사진을 보며 그 시절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억도 새록새록 살아났다. 이런저런 장면 위에 어머니와 각별했던 바르트가 사진을 붙들고 ‘카메라 루시다’를 써내려간 환영이 겹쳐졌다.

“바르트에 관심이 많아 강의를 수강했어요. 혼자 책을 읽으면 지식 차원에 머무르는데, 수업을 들으면 바르트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수강생 김민권(31) 씨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김씨의 다음 강의는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독. 잠깐의 청강으로 그를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주 1회 수업, 8강 온+오프라인 16만 원, 온라인 9만 원.

이설 기자 snow@donga.com journalog.net/tianmimi

‘사랑, 죽음, 그리고 사진’ 김진영 씨

지식 소매상 그 이상 내용 전달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자발적 수강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 소화력이 좋고 적극적이다. 지식 소매상이지만 그 이상 모티베이션을 줄 수 있어서 기쁘다.”

한마디 한마디에 인문학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담겨 있었다. 강사 김진영 씨는 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으로, 10년째 대학과 대안 공간에서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려대 독문과 석사를 마친 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발터 벤야민을 전공했다. 학교도 아닌데 매번 보충수업을 하는 열혈 강의로 팬이 많다. 인문학적 기질 100%로, 스스로 “도서관 인생을 살았다”라고 말한다.

▼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가 뭔가.

대학에 자리를 못 잡았지만, 인문학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이 경제적인 구조의 덕을 봐서 혜택을 받은 결과물 모두를 포함한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서 공부만 하고 살았다. 그 혜택을 사회에 되돌리는 것이 강의의 중요한 목적이다.

▼ 대중인문학 열풍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인문학은 전통에 의해 뿌리내리는 것이지, 지금처럼 목적에 따라 부침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독일에서 15년 유학했는데, 그곳은 교육방식 자체가 인문학 전통 아래서 이뤄진다. 자유로운 의견, 자기 판단, 주체 의식은 단기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문학이 현실과 만나는 것에는 긍정적이지만, 시장화와 엉켜 비판정신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다.

▼ 수강생들의 면면과 수강 목적은?

연령대와 직업은 다양하다. 여가선용 혹은 지식에 대한 욕구로 오는 분이 가장 많다. 일상이 있지만 이상주의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오는 수강생도 있다. 자기 교양을 쌓으려는 트렌드 영향도 커 보인다. 사실 지식에 대한 욕망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제도교육에서 실용화된 지식을 강요하다 보니 공부하기 싫다는 편견이 생겼을 뿐이다.

국가 운영과 ‘용가리’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몇 차례나 돌고 나서야 건물에 다다랐다. 3월 8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동양학문 교육기관인 ‘동인문화원’ 5층 강의실. 강사 전헌 씨가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첫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수강생 연령대는 20대에서 60대 후반까지 다양한 편이지만, 성균관대에서 전씨의 대학원 수업을 듣는 이가 다수였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은 유명하지만 읽기가 어렵다. 정치학 전공자도 독파하기 어려운 책으로 알려졌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영생 동물의 이름으로, 책에서는 교회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를 뜻한다.

“리바이어던은 전쟁의 시대에 토머스 홉스가 백성을 위해 쓴 글입니다. 여길 보세요. 1651년 책이 출판될 때 표지에 등장한 그림입니다. 이 안에 수많은 사람이 가득 차 있죠. 리바이어던은 사람으로 이뤄진 나라입니다.”

이날 수업에서는 리바이어던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다. 전씨는 책 표지를 벗겨 들고 교단을 누비며 설명해나갔다. 그가 양 주먹을 쥐고 팔을 번쩍 들며 말했다.

“리바이어던은 오른손에 칼,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전쟁하는 칼과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지팡이. 지팡이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하늘의 나라가 땅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지죠.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이름을 쓴 건 파격적입니다. 어떤 학부생은 이걸 ‘용가리’라고 부르더군요.”

엄숙하게 경청하던 수강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강의는 마치 유기체 같았다. 전씨는 동서양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리바이어던이 쓰였던 시대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학생들은 갈수록 전씨의 강의에 미혹됐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한 학기 동안 쉽지 않은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올봄, 거대한 리바이어던과 맞닥뜨려 고군분투할 수강생들의 미래가 떠올랐다. 강의는 인문학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칼을 다듬는 역할을, 인문학은 지팡이를 다듬는 역할을 합니다. 한데 오늘날 학문은 전부 칼에 쏠려 있어요. 요즘의 형상은 한쪽 팔만 가진 왼팔 장수와도 같은 거죠.” 주 1회 수업, 한 달에 5만 원.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journalog.net/kooo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 전헌 씨

이기적 존재 인간만 얘기해선 안 돼


나는 인문학과 바람나고 싶다
유학의 요람 성균관에서 서양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전헌(69) 씨가 그 주인공.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그는 2004년부터 객원교수 신분으로 성균관대에서 서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05년부터는 동인문화원에서도 서양 고전을 가르친다.

▼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교재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토머스 홉스는 국가주의의 태동 시기 ‘세상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전쟁통이 되겠다. 인간은 싸움만 할 줄 아는 존재구나. 하지만 그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끝없이 알기를 원하는 존재다. 홉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 ‘국가는 리바이어던, 즉 용가리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국가가 돌아가는 데는 이치가 있고, 이를 아는 게 인문학이다’라고 했다.”

▼ 우리 시대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인문학은 사람 공부다. 요즘엔 인문학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다 빼고 인간만 이야기한다. 인문학은 인간뿐 아니라 만물을 포함하는데, 인간만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니 인문학이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잘해봐야 전쟁이나 하지, 평화를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인문학이 무너지는 거다.”

▼ 인문학의 힘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가족을 출근시킨 뒤 어머니들이 많이 와서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난 뒤 교실 분위기가 재미있다. ‘어, 집안에 이런 문제가 있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해법이 마음속에 떠오르네’라고들 한다.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애덤 스미스의 책을 읽었는데, 갑자기 내 문제가 풀리더라는 거다. 이게 인문학의 힘이다. 자신의 환경, 처지와 관계없이 마음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된다.”



주간동아 2011.03.14 778호 (p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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