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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고추를 만졌어요 vs 너 지어낸 얘기지”

아동 성폭력 진술 잇따른 무죄 선고 … 신빙성 논란, 제도 재정비 목소리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고추를 만졌어요 vs 너 지어낸 얘기지”

“고추를 만졌어요 vs 너 지어낸 얘기지”

아동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전문가가 성폭력 피해 아동의 진술을 받을 때 진술의 신빙성을 확보할 수 있다.

2009년 9월, 네 살짜리 딸을 둔 어머니 A씨는 충격에 빠졌다. 딸과 동갑내기 딸 친구를 재우며 “내일 어린이집에 가야 하니 일찍 자자”라고 하자 딸 친구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 원장선생님이 때리고 고추를 만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딸 친구는 “찡찡짱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시늉까지 했다. 딸도 “원장선생님이 고추를 만졌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원장 B(44)씨는 “‘진 땅 장화, 마른 땅 운동화’를 중국식 발음으로 이야기했을 뿐 찡찡짱어라 부르며 성기를 만지는 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A씨의 신고로 원장 B씨는 아동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2010년 12월 26일 부산지방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딸은 조사과정에서 B씨가 만진 부위를 묻는 질문에 목, 배, 배꼽 등을 가리키며 다른 답을 했고, 딸 친구도 ‘찡찡짱어’를 두고 “그냥 일하는 거요”라며 다른 대답을 했다. 재판부는 이에 “아동의 경우 현실감시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상상과 현실을 혼동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유도된 의심이 있다”고 판시했다.

의도적 거짓말 vs 스스로 진술 수정

광주에서는 1심 판결이 2심에서 뒤집히기도 했다. 초등학교 경비원 C(71)씨는 2010년 9월 16일 이 학교 2학년 아이(사건 당시 7세)를 성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자 어머니가 목욕 중 성기가 부푼 이유를 묻자 딸이 울면서 C씨를 지목해 경찰이 수사에 나선 것. 딸이 경비실의 구조와 비품 위치, 걸린 옷가지까지 기억하며 당시 상황을 세세히 진술해 1심은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딸이 피해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진술과 객관적 정황이 달랐고 일부는 상상이라고 인정한 점, 피해를 당한 뒤에도 봄 소풍을 밝은 표정으로 다녀온 점 등을 고려해 무죄를 선고했다.

아동 진술의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은 오래됐다. 통상 아동의 인지·사고 능력, 기억력이 성인보다 떨어지고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어른의 유도 질문과 암시에 쉽게 말을 바꾸고 의도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아동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전주대 법행정학부 권창국 교수는 “아동 증언 능력에 관한 부정적 태도는 경험 사례보다 아동 지적 능력에 대한 편견이나 우려에 기인한다. 유도 질문을 최대한 자제하고 편안하고 중립적인 환경에서 자유롭게 진술이 이루어지면 아동 진술도 신빙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아동이 말을 바꾸는 것을 단순히 거짓말로 치부하기보다 스스로 진술을 수정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동 진술의 신빙성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아동 성폭력 범죄에서 아동의 진술이 범죄 사실 입증에 결정적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의학적, 정황적 증거 확보가 어렵거나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 뒤에 아이가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경우 신빙성 있는 진술만이 피해 아동을 구제하거나 반대로 억울한 누명을 쓰는 피의자를 막을 수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아동 성폭력 재범 방지 및 아동 보호대책’ 보고서에서 “아동의 특성에 대한 고려 없이 수사하는 경우 피해 아동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고, 진실을 말하는 경우조차 아동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소지도 크다”고 주장했다.

경찰, 검찰 등 사법기관도 아동 인권을 보호하고 아동 진술의 신빙성을 높이려 애쓰고 있다. 경찰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 진술분석 전문가를 전국에 있는 성폭력 원스톱지원센터에 두고 진술 내용에 대한 신빙성 분석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검찰도 ‘성폭력 사건처리지침’을 만들어 피해 아동이 원하면 수사관이 직접 가정을 방문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술하도록 돕고, 반복된 조사와 증언으로 아동이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을 줄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동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전문가를 하루빨리 확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동 성폭력 조사 경험이 있는 한 경찰관은 “피해 아동은 대답할 준비가 안 됐는데 수사관들이 단도직입적으로 사건에 대해 묻는다. 또 아동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 채 질문하면서 아동이 질문을 잘 이해 못하거나 대답을 바꾸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한다”고 말했다. 성인 대상 수사에 익숙한 수사관이 아동끼리 쓰는 놀이 및 신체 부위 가리키는 언어를 이해 못해 아이의 뜻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수사관이 조급한 마음에 아동에게 범행과 관련된 정황을 암시하거나 유도 질문을 해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무심히 사용하는 타이핑 작업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일선 경찰서 수사관들은 1차 조서를 작성할 때 아동에게 던진 질문과 아동의 대답을 곧장 워드로 작성한다. 한 경찰도 “타이핑을 하느라 정작 아동의 말은 수동적으로, 또는 건성으로 듣는다. 아동도 타이핑하는 시간을 지루하게 느껴 진술에 집중을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결과에 따르면 54건의 아동 성폭력 사건 중 경찰서에서 이루어진 41건 모두 타이핑 작업을 통해 조서가 작성됐다. 나머지는 아동 심리전문가가 조사를 돕거나 원스톱지원센터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41건의 사건 관계자 절반 이상은 “타이핑 작업이 심각하게 조사를 방해했다”고 답했다.

국내 최초 전문인력 탄생 빛 볼까

“고추를 만졌어요 vs 너 지어낸 얘기지”

여성부는 법을 개정해 진술조사 전문인력의 활동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아동의 증거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없을까? 여성가족부(이하 여성부)가 배출한 ‘아동·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진술조사 전문인력‘에 관심이 모인다. 여성부는 1월 27일 피해자 조사를 담당하는 경찰, 검찰 수사관 9명을 포함해 19명의 전문인력을 배출했다. 경찰, 검찰도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전문인력을 수사계획 수립에 참여시키고 조사과정에 배석토록 해 전문가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여성부 관계자는 “전문인력은 아직 자문을 해줄 뿐 직접 진술을 받지 않는다. 앞으로는 법을 개정해 전문가가 진술을 받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뉴욕 지방검찰청 소속 CAC (Child Advocacy Center)에서는 수사관이 아닌 아동 진술조사 전문가가 직접 성폭력 피해아동 조사를 한다. 경찰과 검찰은 조사과정을 관찰하고 필요한 질문을 전문가에게 전달할 뿐이다.

교육을 수료한 교육생들은 포부가 남다르다. 인천지방경찰청 인권피해자보호팀 박민정 경장은 “아동심리 이론부터 실무적인 부분까지 교육을 받아 큰 도움이 됐다. 아동학 전공자임에도 아동의 언어 중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 아동의 연령, 언어 수준에 맞게 진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 검찰 관계자도 “진술 기법에 대한 연구는 아동 성폭력뿐 아니라 전반적인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1.02.21 775호 (p54~55)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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