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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남도길 대장정 희망을 걷다 10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제주도 올레길7코스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대단한 바람이었다. 바닷가 돌섬 사이를 걸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는데, 키가 170㎝ 넘는 기자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돌에 무릎을 긁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을 때는 ‘이러다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 바람은 제주의 삼다(三多)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수리에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반가웠고, 눈앞에 차례로 펼쳐지는 다양한 제주도의 풍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걷다 보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밉기만 하던 제주도의 바람이 시원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바람에 모든 걱정과 근심이 날아가는 기분. 나라는 작은 인간, 그 홑겹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제주의 자연과 생활 집약해놓은 코스

올레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제주도 관광은 올레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한다. 2007년 문을 연 올레길 덕에 2010년 제주도는 처음으로 ‘연간 관광객 7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커플티를 맞춰 입은 신혼부부의 빈자리는 등산화에 트레킹 복장의 중장년이 채웠다. 관광 코스만 콕 찍듯 갔다 와서는 ‘볼 것 없다’고 실망하는 기존의 여행과 다르다. 올레길은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놀멍 쉬멍’ 제주도의 속살을 바라볼 수 있다. 사시사철 좋은 올레길이지만 겨울 올레길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 겨울 올레길의 키워드는 바람이다.

2011년 1월까지 올레길 17개 코스가 문을 열었다. 각 코스의 길이는 8~19㎞로 가장 긴 코스가 7시간 걸린다. 오름과 바다가 이어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1코스(시흥~광치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경승지’를 지나며 난대(暖帶) 식물이 울창한 5코스(남원~쇠소깍), 제주 농촌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14코스(저지~한림) 등 코스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 다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찾고 제주의 자연과 생활을 집약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7코스, 외돌개~월평이다.



7코스의 시작 지점인 외돌개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서귀포행 리무진(600번)을 타고 뉴경남호텔 앞에서 내린 뒤 택시를 타는 게 가장 좋다. 출발점이 중문이나 서귀포 시내라면 바로 택시를 타는 게 낫다. 기사에게 외골개 혹은 7코스 시작 지점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된다.

외골개 입구에는 제주올레 안내소가 있다. 올레길을 완주할 때마다 스탬프를 찍는 패스포트(1만5000원), 상큼한 색깔이 인상적인 ‘당근밭 스카프’(6000원), 제주도 여성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꿰매 만든 조랑말 모양 인형(1만5000원) 등 제주올레 기념품을 판매한다. 기분 좋게 기념품을 구경하고 무료 지도 한 부를 챙겼다.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왼쪽) 제주 올레의 상징인 조랑말 ‘간세’.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온 말로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라는 뜻이다. 머리가 향한 쪽이 길의 진행방향이다. (오른쪽) 돔베낭길에 벌써 유채꽃이 피었다.

외돌개 할망 아직도 바다를 향한 그리움

바다를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걷다 쑥 솟아오른 바위 하나를 만났다. 손 뻗으면 잡힐 것처럼 크고 생생했다. 바로 외돌개다. 외돌개는 ‘외롭게 서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약 1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놓을 때 생성된 바위다. 오랜 시간만큼 켜켜이 쌓인 전설도 많다. 고려 말기 이곳에서 말을 키우며 살던 몽골족은, 고려에서 중국 명나라에 제주마를 바치기 위해 몽골족을 수탈하자 이에 반발해 목호(牧胡)의 난을 일으켰다. 최영 장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했고, 목호들은 외돌개를 보고 대장군이 진을 친 것으로 여겨 모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덕에 외돌개는 장군석(將軍石)이란 별칭도 얻었다.

더욱 애절한 버전의 전설도 있다. 한라산 밑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던 한 노부부. 어느 날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할머니가 바다를 향해 “하르방, 하르방” 하고 외치다 결국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할망바위’라고도 불리는 외돌개는 가만히 보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하르방’을 외치는 입을 닮은 듯하다. 그 왼편으로 납작 엎드린 바위는 할아버지바위로, 할아버지의 시신이 떠올라 바위가 됐다고 한다. 과학적 근거도, 역사적 배경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관광객이 바글바글하다. 바로 한류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 장금(이영애 분)의 스승 한상궁(양미경 분)이 제주도 유배길에서 장금이에게 업힌 채 숨지는데, 그 장면을 바로 외돌개에서 찍었다. 현재는 드라마 사진이 담긴 표지판만 덩그러니 있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 일본, 중동 등 해외 관광객도 많았다. 드라마 때문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았다.

다시 길을 재촉해 ‘돔베낭길’에 닿았다. ‘돔베’란 제주어로 도마, ‘낭’은 나무를 뜻한다. 이 길에 도마처럼 잎이 넓은 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이다. 상록수가 울창해야 할 길이지만 겨울이라 군데군데 색 바랜 잎과 엉킨 나무줄기만 가득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바닥의 흙이 조금씩 날리면서 눈이 따끔거렸다. 때로는 왼편으로 펼쳐진 빛나는 바다를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 작고 노란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유채꽃이었다. 키 큰 나무들은 색을 잃고 덩치 큰 기자도 눈도 못 뜰 만큼 바람이 부는데, 저 한 뼘 조각볕이 닿는 곳에는 작은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강정포구를 지나는 길. 흰 갈매기떼가 반긴다.

조각볕에도 피어나는 유채꽃

바다의 색은 매번 다르다. 장소, 각도 그리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바다는 한없이 맑고 푸르다. 가까이서 보는 바다는 회색빛이다. 파도는 희게 부서지고 바닥은 검다. 제각기 색을 뽐내는 바다를 보고 또 보면서 넘칠 만큼 마음에 담았다.

40분가량 걸으니 수봉로에 닿았다. 이름부터 정겨운 수봉로는 제주도민 김수봉 씨가 2007년 12월 올레꾼들을 위해 삽, 곡괭이만으로 만든 길이다. “올레꾼이 가장 사랑하는 자연생태길”이지만 겨울에는 푸른 숲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제주의 겨울은 흰색이 아니다. 제주도는 몇몇 경우가 아니면 한파에도 기온이 영상이라 눈이 잘 오지 않고, 눈이 와도 금방 녹는다. 길을 걷던 날도 서울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왔지만 제주에는 10분가량 눈가루만 날렸을 뿐이다. 대신 제주의 겨울은 갈색이다. 색을 숨기고 몸을 숙인 나무들을 벗하며 걷다 보면 덩달아 겸손해진다.

이젠 길이라기보다 돌밭이다. 제주도 특유의 화강암이 해안을 따라 널려 있다. 요리조리 바위를 밟으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렸다. 왼편 바다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만 했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렇게 1시간여, 마침내 법환포구에 다다랐다.

법환포구의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늙은 호박을 넣고 끓인 갈치국과 짭조름한 옥돔구이를 반찬으로 보리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웠다. 제주도 소주인 ‘한라산물 순한소주’도 한 병 곁들였다. 물이 좋아서인지 소주 특유의 알싸함이 덜했다. 조금은 알딸딸해서 따뜻한 온돌방에 거의 눕듯 기대앉으니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음식점 앞 그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린아이가 물고기를 안고 있는 그림은 화가 이중섭의 작품. 이중섭은 평안남도 정주 출신이지만 ‘제주도의 화가’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중섭도 왠지 그 애칭을 좋아할 것 같다. 평생 가난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이중섭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일본인 아내와 두 아이, 그렇게 네 식구가 제주도의 5㎡(약 1.5평) 내외의 작은 토방에서 살았던 1년 남짓이었다. 기자가 먹은 갈치국도 일품이었지만, 이중섭의 네 식구가 이마를 마주하고 먹었을 갈치국보다는 덜했을 것 같다.

시원한 갈치국 이중섭도 맛보았을까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월평포구 지나 있는 해녀상. 제주도 엄마들의 모습이다.

길 가운데 해녀 동상이 눈길을 잡았다. 막 물에서 나온 듯 지친 얼굴에 뱃살 접힌 것까지 표현돼 재미있다. 사시사철 물질 하나로 가족을 부양한 제주도 엄마들의 모습 그대로다. 일강정 바당올레길에 들어서니 다시 자갈밭이 펼쳐졌다. 험하디험한 바위 밭이었던 이 길은 올레꾼들을 위해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낸 끝에 검은 돌이 융단처럼 깔린 걷기 좋은 길로 변신했다.

길을 재촉하다 보니 저 멀리 까만 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서건도다. 서건도는 썩은 도(島), 즉 썩은 섬이란 뜻이다. 섬 둘레에 해초가 가득해 마치 섬이 썩은 것처럼 보인다. 서건도는 하루 두 번 간조 때마다 뭍에서 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린다. 날씨가 좋은 날은 바닷게와 보말을 잡는 해녀들도 볼 수 있다.

길은 제주풍림리조트 안 올레꾼 쉼터로 이어졌다. 걷기에 지친 올레꾼들이 잠깐 앉아 쉬며 커피나 간단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풍림리조트 바로 뒤편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맑은 물, 강정천이 흐른다. 제주도민의 식수원인 강정천은 1급수로 봄에는 은어도 있다. 추운 날씨도 잊었는지 아이들이 물가에서 첨벙거렸다. 한 아이는 더운지 점퍼까지 벗어던지고 반팔 차림이었다. 새우를 잡았다기에 달려가 봤더니 새끼손가락 한 마디도 안 돼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신기한다며 연방 감탄을 했다.

다시 풍림리조트 쪽으로 올라와 길을 이어 걸었다. 왼편으로 꺾어 다리를 건넌 뒤 우측으로 갔다. 강정마을로 가는 길. 사람보다 개들이 먼저 맞았다. 팔자 좋아보이는 개들은 외지 사람에게도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에서 ‘해군기지 결사반대’란 노란 현수막이 눈에 거슬렸다. 2007년 정부는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 52만㎡에 걸쳐 전략기동함대 기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함정 20여 척과 15만t급 크루즈 선박 2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는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을 건설하는 것. 해군기지가 생겨도 이 올레길의 아름다움이 지켜질 수 있을까? 올레길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안쓰러웠다.

마을을 지날 때 비닐하우스에서 한라봉, 귤, 금귤 등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다 강정마을 길목에서 한라봉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가게를 찾았다. 올레꾼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한라봉은 1개에 2000원. 달달하고 시원한 향이 입 안에 번졌다. 또한 필리핀, 홍콩 등에서나 맛봤던 이국적인 과일 용과(dragon fruits)도 있다. 용의 알처럼 붉고 울퉁불퉁한 모양의 용과는 마의 일종으로 단맛이 별로 없는 ‘덜 익은 수박맛’이지만 건강에 좋고 왠지 분위기도 색달랐다.

빨간 등대가 반겨주는 강정포구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강정포구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낚시꾼.

강정마을을 굽이굽이 지나 다시 해안선을 따라 걷다 강정포구를 만났다. 하얗게 늘어진 제방 위에 불쑥 솟은 빨강 등대가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다시 바람에 맞서 길을 재촉했다. 하도 바람이 세다 보니 얼굴뿐 아니라 장갑 낀 손까지 얼얼해졌다. 월평포구에 다다라 길을 오르면 ‘선교사의 집’이라는 펜션이 있다. 이곳에서 콜택시를 불러 여정을 마쳐도 좋고, 1.3㎞ 2차선 도로를 따라 더 걸어 월평마을 아왜낭목 월평 송이슈퍼마켓까지 닿아도 좋다.

송이슈퍼 앞에서 콜택시를 불렀다. 그곳에서 외돌개까지 돌아가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3분. 그 짧은 거리를 6시간 동안 돌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그보다 많은 바람을 맞았다. 능금보다 붉어진 양 뺨과 거칠어진 손등은 즐거운 겨울 여행에서 얻은 기념품이었다.

Basic info.

☞ 교통편


올레길 7코스 외돌개 시작. 제주국제공항~서귀포행 리무진(600번) 뉴경남호텔 하차, 외돌개까지 택시 이용

문의

7코스 올레지기(010-9887-1044)

홈페이지

www.jejuoll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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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2011.01.31 773호 (p54~58)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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