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2011.01.24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순조와 순정왕후의 인릉(仁陵)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1-24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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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홍경래의 난 등 내란을 막은 순조대의 무석인은 장엄하고 근엄한 모습이다.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와 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한 이곳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다가 강남 개발과 함께 서울로 편입된 지역이다.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이 능역 안에 함께 있어 조선 초기와 후기의 능원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수빈박씨다. 배다른 형 문효세자(1782~1786)가 일찍 죽고 난 후 정조 나이 39세에 귀하게 얻은 아들이다. 순조는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10년 후인 1800년 2월 11세로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왕에 등극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승하 4개월 전에 세자 책봉이 이뤄졌다.

    순조는 11세의 나이로 정조 승하 6일째 되는 날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조선의 역대 왕은 대부분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어린 나이에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대왕대비는 희정당의 동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전영(前楹·기둥 앞)에 발을 늘어뜨리고(垂簾), 어린 순조는 발 건너편의 서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수렴청정의 예를 갖추었다. 이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가 성종 때 수렴청정을 한 예를 따른 것이었다.

    11세에 즉위 정순왕후가 조종

    중국에서는 수렴청정 결재 때 구중궁궐의 안채에서 대비가 내시를 시켜 결재하나, 조선 왕실에서는 발 뒤에서 직접 결재를 해 번거로움과 전달상의 오류를 막았다. 수렴 청대(請對·뵙기를 청함)는 한 달에 6회씩이었고, 병관(兵官)과 같은 중요한 결재는 왕에게 직접 고하고 대비가 재결했다. 순조가 수렴청정을 받을 때는 서증조모 정순왕후, 조모 사도세자 비 혜경궁 홍씨, 서모 효의왕후, 친모 수빈박씨 등 4대의 왕실 웃어른이 있었으나 정치 세도가들의 위력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렴청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경주김씨로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뻘인 사도세자, 손주뻘인 정조와 정치적 경쟁관계를 이뤘던 서증조모 정순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순조 나이 16세 때였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20세까지지만 대비인 정조비 효의왕후는 세도가들의 압력으로 순조가 친정에 들어가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 순조비 순원왕후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원래 세도(世道)는 말 그대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의미하지만 정조 때 홍국영 등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한 데다, 노론 중심의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돼 삼정의 문란이 생기면서는 한자어가 세도(勢道)로 변질됐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때문일까.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정치와 사회 기강은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무너져내렸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됐는데 오가작통법이 그것이다. 34년 4개월을 재위한 순조는 수렴청정과 세도정치로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그 때문인지 한창 일할 나이인 45세에 생을 마감했다.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실세였던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그는 정조 24년 세자빈 삼간택 중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한 뒤 정순왕후의 오빠인 경주김씨 김관주 등의 방해로 간택에 어려움을 겪다가 순조 2년에 이르러서야 왕비로 채택됐다. 한때 자신의 며느리(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인 풍양조씨(후에 추존 익종비 신정왕후)가 헌종의 대리청정을 빌미로 세력을 확장해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효명세자가 죽자 헌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세도정치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와 신정왕후의 친정인 풍양조씨 의 세력싸움으로 난국을 맞았다.

    헌종이 자식 없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세력 안동김씨를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사를 다스리던 것) 정치세력으로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강화에서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해 왕위를 잇게 하고 그의 비를 자신의 친가인 김문근의 딸로 간택해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누렸다.

    안동김씨 득세 정치적 혼란 불러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조선 후기 대표적 합장릉의 형식으로 평가받는 인릉 전경. 이곳은 근래까지 1653만㎡ 이상의 넓은 정원이었다.

    순조는 그의 보위 34년(1834) 11월 13일 해시(亥時·밤 11시경)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정조, 순조대의 대학자이자 의리(醫理)에도 정통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명의들과 진언해 강귤차(薑橘茶·생강과 감귤차) 등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순조가 경희궁에서 승하한 것은 당시 정궁이던 창덕궁에 불이 나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해 있었기 때문이다. 순조의 장례는 왕세손이었던 헌종이 대보를 이어받아 국장을 치러야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해 치렀다.

    순조의 능역이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터 잡고 조영된 것도 그 때문이다. 순조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인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 왼쪽 구읍지 뒷산 산줄기에 을좌신향(乙坐申向·동남을 등지고 북서향)으로 모셔졌으나 22년 뒤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반대로 세력이 커진 신정왕후의 친정 풍양조씨가 순조의 인릉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며 철종 7년(1856) 현재의 내곡동 헌릉 서측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북을 등지고 남향)으로 천장했다. 세도정치의 무리가 순조대 능묘에 대한 풍수 논리를 부정적으로 몰아 정치적 공격을 한 결과였다.

    이런 세력싸움은 순조의 능원 터를 잡을 때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파주 장릉의 우강에 자리 잡아 공사를 했지만, 산릉의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다고 해 장릉의 국내(局內)로 옮겼다. 당시 풍양조씨 줄에 섰던 상지관 이시복은 흙빛을 은폐했다는 명목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이때 산릉도감(능역 조영 총책임자)을 맡았던 이면승은 이중 공사의 고통 때문에 현장에서 과로사하기도 했다.

    서초동 헌릉 우강으로 천장된 후 순원왕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태조, 세조, 선조, 인조에 이어 순종(純宗)이었던 묘호는 순조(純祖)로 바뀌었다. 시호를 내리는 의전은 지극히 엄중했는데 조(祖)는 일반적으로 왕업을 창시하거나 큰 업적이 있을 때 붙였다. 태조는 왕업을 창시했다 해서, 세조와 인조는 정권을 바꿨다는 이유로 조를 붙였다. 선조는 좀 복잡한데 태조를 조선의 왕업 창시자로 인정하지 않던 중국을 설득해 인정받은 공적, 임진왜란 등을 평정한 공적 등으로 조라는 묘호를 붙였다. 순조는 당시 최장수 조정정략가인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 1783~1873) 등이 홍경래의 난 등을 평정한 공적으로 조(祖)로 할 것을 주청해 이뤄졌다. 이것도 세도정치에 의한 아부성 묘호 수정으로 추정된다.

    순조를 천장한 이듬해인 철종 8년(1857) 8월 4일 술시에 창덕궁 양심합에서 순원왕후가 승하했다. 친정인 안동김씨 일가이며 정국의 실세인 김병기, 김병국(고종 때 김옥균의 양부) 등이 인릉의 국내(局內)로 자리할 것을 주장해 순조와 함께 자좌오향으로 합장됐다. 합장할 때 지관들은 이곳을 ‘혈이 뭉친 곳이 풍만하고 십분대길(十分大吉)’이라 호평했다. 이 자리는 400여 년 전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침이 있던 자리였는데 좋지 않다고 해 세조가 천장을 주장하고 예종 때 실행에 옮긴 그 터다. 하지만 지금 가보아도 길지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터가 좋다.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인릉의 문석인(오른쪽)과 무인상은 매우 사실적인 표정으로 묘사돼 있다.

    매우 사실적 표정의 문무석

    인릉은 겉으로 봐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해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합장릉은 혼유석을 왕과 왕비의 것 2개를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합장릉 형식으로,. 이는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문무석인의 생기 있는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해 조선 후기 석물조각의 대표적 문무석으로 꼽힌다. 특히 무석인은 순조 때 홍경래의 난 등 각종 민란을 물리친 무인상의 모습처럼 우람하고 근엄하게 조각돼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천장 후 조영을 할 때 철종이 자신을 일개 농군 강화도령에서 왕으로 발탁해준 순원왕후에 대한 고마움에서 직접 표석의 글을 써서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이 순조를 순조숙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이다. 인릉의 석물 일부는 선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바로 옆에 조영됐던 희릉 초장지의 석물을 사용해 조영한 것으로 ‘산릉도감의궤’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러한 기록물은 조선 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진정성을 인정받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헌·인릉 지구는 세계유산 등재 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능역 앞 비닐하우스촌의 경관 계획 및 사신사(四神沙·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주산) 등의 보존 대책 마련, 일부 국가기관이 쓰는 주차시설 등의 원형 복원을 권고받았다. 이에 대한 보존 대책과 복원 계획을 철저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렵게 얻은 세계유산이 위험유산이 될 수도 있다. 세계유산 등재 후 국제기구 각종 위원회는 이들의 이행 여부를 계속 모니터링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인릉 매표소 앞에 묻힌 금천교와 재실과 능원을 잇는 제례 동선의 복원도 이루어져야 한다.

    순조는 순원왕후와 숙의박씨 사이에서 1남 4녀를 뒀으나, 유일한 아들인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헌종이 왕통을 이었다. 헌종의 능호는 경릉(景陵)이며 구리시 동구릉의 서측 언덕에 있다. 헌종의 즉위와 더불어 추존된 익종(문조익황제)의 능호는 수릉(綏陵)으로 동구릉 동측 언덕에 있다.

    헌인릉 지구 오리나무 숲

    1653만㎡ 최고의 숲…일제강점기 때 파괴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우수한 생태자원으로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돼 특별관리를 받고 있는 오리나무숲.

    헌·인릉 지구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에서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해 특별 관리한다. 이곳은 조선 초기 태종의 헌릉과 세종의 영릉 능침이 있었고, 이후 조선 말기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침 정원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이 능원의 나무 하나, 풀뿌리 하나까지 보호 관리했던 천연의 숲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파괴돼 오리나무 숲만 남았다. 그 전까지는 1653만㎡가 넘는 넓고 잘 가꿔진 최고의 숲이었다.

    지금까지 잘 보전됐다면 수도 서울에 광릉 숲 같은 녹지가 있었을 터. 다행히도 이번에 세계유산에 포함돼 영원히 보전할 기회를 잡았다. 여기에는 남아 있는 오리나무 숲도 한목했다. 오리나무는 장수목으로 옛날에 도로의 오리(五里)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에는 오리나무를 능역의 입구 습한 지역에 인위적으로 심어 관리했는데, 낙엽활엽수의 교목(큰나무)으로 습하고 비옥한 정체수(停滯水)가 있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목질부가 견고하고 붉은색을 띤 이 나무는 양수로 능역 남측의 합수지(명당수) 연못(주작) 근처에 심어 관리했다. 목질이 붉은 것은 오행 중 남측을 상징하며, 목질은 말라도 갈라지지 않아 목가구 제조용으로도 많이 쓴다. 한자 이름은 ‘五里木’ ‘赤陽’ ‘茶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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