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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권력 개입까지 부른 19c ‘설탕 전쟁’

참을 수 없는 단맛 하층민 식탁 장악…식민지 농장주들 본국에 맞서다 백기 투항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권력 개입까지 부른 19c ‘설탕 전쟁’

권력 개입까지 부른 19c ‘설탕 전쟁’
음식과 문명의 관계를 연구해온 미국의 저명한 원로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 교수가 내한해 공개강좌를 가졌다. 국내 언론사와 학술재단이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에 민츠 교수가 초빙된 것은 음식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맛있는 음식, 건강한 음식, 색다른 음식 등 음식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음식을 주제로 한 만화, 영화, TV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유명 요리사의 경력이 화제가 되고, 요리사를 지망하는 젊은이가 늘어나는 현상만 봐도 그렇다.

1985년 초판 간행된 ‘설탕과 권력(Sweetness and Power)’은 민츠 교수의 인류학자로서의 대표적 연구업적이다. 그는 이 저술에서 오늘날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설탕을 대상으로 음식이 단순히 미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권력 및 자본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제 고전이 된 이 저술은 음식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음식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탄수화물에 속하는 유기화학물 설탕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서 추출한 액체 내용물을 가열, 정제, 농축, 응고시켜 얻는 물질이다. 사탕무에서 설탕을 제조하게 된 때가 19세기 후반인 만큼 설탕의 역사는 주로 사탕수수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설탕의 역사적 기원은 25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 인도에서 처음으로 ‘벌의 도움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 즉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설탕을 유럽에 소개한 것은 아랍인이다. 8세기 이후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어인들이 사탕수수 경작과 설탕 제조 기술을 전파한 뒤 키프로스, 몰타, 로도스 등 지중해 동부 지역에 사탕수수가 보급됐다. 그러나 사탕수수는 기후변화가 거의 없는 열대나 아열대에 적합하고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작물이라 기후조건이 불리하고 전쟁, 역병 등으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중세 유럽에서는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유럽의 대외팽창 역사와 함께 확산



15~16세기 대항해 시대와 더불어 설탕의 역사는 유럽사, 특히 유럽의 대외팽창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즉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면서 마데이라, 카나리아 등 대서양 제도를 거쳐 16세기 서인도 제도에 사탕수수가 반입된 뒤 신대륙의 대표적 작물로서 경작이 본격화됐다. 신대륙에서 처음 사탕수수 경작을 주도한 나라는 산 도밍고를 중심으로 카리브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원주민 외 아프리카 출신 흑인노예 노동력을 동원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제조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식민지 경영에서 생산적인 농업보다 비생산적인 귀금속 수탈에 치중한 스페인은 설탕 생산에 필요한 기술, 자본, 노동력이 미흡해 실패했다.

권력 개입까지 부른 19c ‘설탕 전쟁’

동양에서 온 새로운 기호품, 차(茶)가 대중화되면서 차의 w쓴맛을 줄이는 설탕의 용도가 부각됐다. 차의 성공이 곧 설탕의 성공이었다.

스페인을 대신해 신대륙에서 설탕 사업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신대륙에 진출한 다른 어떤 경쟁국과는 달랐다. 영국은 유럽의 공산품,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신(新)작물을 잇는 삼각무역의 경제적 이점과 담배 및 커피, 카카오, 초콜릿 등과 함께 신대륙의 새로운 산물로 등장한 설탕의 잠재적 수요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17세기 중엽까지 카리브 지역에서 스페인 세력을 축출하고 바베이도스, 자메이카 등을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 확보했으며, 유럽시장에 설탕 공급을 독점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설탕은 소비층이 왕실이나 귀족, 일부 부유층에 국한된 값비싼 사치품이었는데 이들 소수 특권층 소비자들은 설탕을 주로 세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우선 설탕은 그들에게 만병통치 의약품이었다. 중세 이래 유럽에서 설탕은 신열, 기침, 가슴통증, 위장질환, 심지어 흑사병의 치료제로 처방됐고, 설탕의 효능에 대한 유보적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6세기까지도 의사와 약제사에게 필수적인 물품이었다. 또한 설탕은 후추, 생강, 육두구 등 동방에서 유래한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육류, 생선, 채소의 맛을 좋게 하는 양념으로 사용됐다. 나아가 설탕은 종교 축일이나 기타 특별한 날에 등장하는 장식용 음식의 재료였다. 액체 및 고체 상태에서 다른 식품과 쉽게 결합하는 속성을 가진 설탕으로 동물이나 건물 모형의 음식을 만든 것이다. 이런 장식용 음식은 사치품으로서 설탕을 소비할 수 있는 지위의 사람들의 권력과 부를 상징했다.

茶 대중화로 급성장한 설탕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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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공화국의 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가 사탕수수를 자르고 있다.

이처럼 설탕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었지만 갈수록 소비가 증가했다. 기존 소비자의 사용량이 늘어난 까닭도 있지만 새로운 층으로 소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설탕을 사용한 장식용 음식은 점차 하향 전파됐는데, 설탕 소비가 신분적 지위를 상징함에 따라 사회적으로 이를 모방하는 추세가 등장했던 것이다. 설탕 소비의 증가세는 특히 영국에서 두드러졌다.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까지 150여 년간 무려 25배가량 증가했다. 영국은 설탕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신대륙에서 생산하는 설탕을 모두 국내시장에 공급해야 할 정도였다.

18세기 한 세기 동안 설탕시장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동양에서 유래한 새로운 기호품, 즉 차(茶)의 대중화였다. 18세기 중엽 관세 인하로 가격이 하락하며 차가 하층계급까지 대중화되자 섞어 마심으로써 차의 쓴맛을 완화하는 설탕의 용도가 부각됐다. 차의 성공이 곧 설탕의 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감미료뿐 아니라 방부제로서의 쓰임새도 설탕 소비 급증에 기여했다. 과일을 보존 처리한 잼을 비롯해 설탕에 절인 각종 음식은 부패를 방지하는 설탕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었다.

감미료와 방부제라는 새로운 용도에 따라 소비가 늘어난 설탕은 1800년경에 이르면 더 이상 특권층이 누리는 사치품이 아니라 하층계급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다. 하층계급에게 설탕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식품이었다. 무엇보다 설탕을 넣은 차와 과일 잼은 상대적으로 값비싼 맥주와 버터를 대체할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또 설탕은 썰렁하고 보잘것없는 하층계급의 식사에 위안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통상 고기, 버터, 치즈 등 보조식품이 부족한 하층계급의 식사에서 주식인 빵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는데, 뜨거운 차에 적시거나 달콤한 잼을 바르는 것은 빵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설탕의 이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설탕은 칼로리가 풍부했고 빵, 차, 잼만으로 한 끼 식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식사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과 연료비를 절약해주었다.

하층계급의 식사에서 설탕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1800년부터 1890년까지 90년간 영국의 설탕소비량이 매 30년간 2~5배씩 증가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세기 새로 출현한 거대한 사회계급, 임노동자 가정의 식탁을 설탕이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품이 된 설탕의 성공을 소비자의 미각을 사로잡은 단맛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권력 개입이 있다. 17세기 이후 영국의 통치 권력은 노예무역을 후원하고 수입관세와 항해조례로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등 신대륙의 설탕사업을 육성하고 후원했다. 설탕에서 수익을 얻었던 농장주, 은행가, 노예상인, 운송업자, 식품상인, 정부관료 모두가 식민지 투자자본을 보호해야 할 이유를 공유했다. 그러나 설탕이 폭발적 수요를 바탕으로 대중의 일상품이 되자 더 이상 보호무역주의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칫 본국의 물자 유통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설탕을, 더 싼 값으로’라는 자유무역의 구호가 권력의 정치적 의무가 됐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설탕에 대한 차별적 관세를 폐지했고 설탕을 무제한으로 공급했다. 설탕의 성공은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설탕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줄이려던 본국의 산업자본가들이 식민지 농장주들과의 갈등에서 거둔 승리의 결과였던 것이다.



주간동아 2010.11.08 761호 (p78~79)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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