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4

2010.09.13

‘현대판 음서’가 도대체 말이 되냐

유명환 前 장관 딸 특채 파문은 ‘공정한 사회’ 정면으로 위반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9-13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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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음서’가 도대체 말이 되냐

    조선시대 과거 모습. 통계를 보면 과거를 통해 초직에 진출한 평균연령은 24세 전후, 음서의 경우 15세 전후였으니 음서의 폐해를 알 수 있다.

    한국사의 고대에 속하는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사회였다. 중세인 고려시대 광종 9년(958)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면서 과거제를 우리 역사상 처음 도입했다. 그러나 고려사회 역시 능력 본위 관료제 사회라기보다는 신분 본위의 문벌귀족사회라 성종 때에는 무시험으로 등용하는 음서제도(蔭敍制度)가 확립됐다.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음서조에 따르면 음서를 크게 문음(門蔭)과 공음(功蔭)으로 구분했다.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음서를 문음이라 하고, 공신 자손이나 특별한 공훈을 세운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을 공음이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왕족 후예, 종신(宗臣·왕족 관직자), 공신 후손, 5품 이상의 고관 자손 등을 대상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직에 조기 진출할 수 있도록 특혜를 줬다.

    왕족·공신 자손 음서로 관직 진출

    음서를 정기적, 항례적으로 시행했을 뿐 아니라 국왕 즉위, 책봉, 쾌차, 국가 경사 등이 있을 때에도 부정기적으로 시행해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아성은 더욱 강화됐다. 음서의 수혜범위는 당해년에 1인 1자를 원칙으로 했으나 탁음자(托蔭者)가 3품 이상일 때는 그 수음자(受蔭者)가 자(子), 손(孫), 수양자, 사위, 외손, 동생, 생(甥), 질(姪) 등 8개 친족까지 확대됐다. 가문의 영광으로 관직은 이미 떼놓은 당상이었다. 물론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간 경우 문한직, 학관직, 지공거직(과거 출제위원) 등 학술 관련 직책에는 취임할 수 없었고, 공개 채용이 아닌 특별 채용 낙하산을 탔으니 처음에는 실제로 근무하는 실직(實職)이 아닌 직임이 없는 산직(散職)인 동정직에 임용됐다.

    그러나 관직 임명에 법적 제한을 받는 한직제(限職制)는 적용받지 않았으니 관직에 조기 진출해 재상까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 셈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모든 음서 출신자는 18세 이상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이 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통계를 살펴보면 과거로 초직(初職)에 진출한 이들의 평균연령이 24세 전후였음에 비해 음서의 경우는 15세 전후였으니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이렇게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인물 중 나이가 가장 적었던 자와 가장 많았던 자를 ‘고려사’와 현전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이가 가장 적었던 인물로는 고려시대 납비(納妃·왕비를 바침)로 최대 벌열(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이 된 경원(인주) 이씨 문중의 이식(李軾, 1090~1151)을 들 수 있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증조부인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은 세 딸을 문종비로 바쳤고, 조부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정(李)은 한 딸을 선종비로 바쳤고 아버지 이자효(李資孝)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됐다. 또 집안인 이자겸(李資謙)은 한 딸은 예종비로, 두 딸은 인종비로 납비해 왕실 부자(父子)와 겹사돈이 됐는데 급기야 인종 때 스스로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의 도참설로 왕위를 노린 역모의 주인공이 됐다.



    이런 막강한 해동갑족(海東甲族)을 배경으로 이식은 헌종 즉위년(1094) 5세라는 어린 나이에 조음(祖蔭)으로 호부서령사(戶部書令史)가 됐다. 그 후 이식은 송나라와 금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왔고 평탄한 환로(宦路)를 걷다가 향년 62세에 병사했다. 그의 묘지명에 “약관(弱冠)에 벼슬에 올라 나라 안팎의 일을 보면서부터 경상(卿相)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공직 진출 공정성과 투명성이 중요

    ‘현대판 음서’가 도대체 말이 되냐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문은 ‘현대판 음서’라는 비난을 받으며 국민을 허탈하게 했다. 사의를 밝히고 외교부 청사를 떠나는 유 전 장관.

    가장 나이 많은 인물로는 수주(수원) 최씨 문중의 최정(崔精, 1076~1157)이 있다. 그의 묘지명을 보면 어려서 청금(靑衿·유생)이 됐으나 예종 3년(1108) 다소 늦은 33세 늦깎이로 외고조부인 삼한공신(三韓功臣·고려 개국공신) 대상(大相) 김칠(金柒)의 문음으로 서리(胥吏)가 됐고, 후일 현과(賢科·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봉선고(奉先庫·왕실 제수품 담당) 부사(副使)로 봉직하다가 향년 82세로 병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최정의 경우처럼 음서 출신자가 음서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에 다시 응시했음은 그것이 훨씬 더 관직생활에 유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부가 관료체제를 구축하면서 실력 위주의 개방사회가 펼쳐지자 음서는 과거제에 밀려 특혜가 많이 축소됐다. 5품에서 2품 이상의 고관 자손으로 범위가 제한됐고, 음서 혜택을 받은 경우에도 문음취재에 합격해야 서리직이 수여됐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가 중세사회였던 데 비해 조선은 근세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전지표라 하겠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국정기조로 설정한 ‘공정한 사회’가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점에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문제가 터졌다. 대통령이 비장미가 감도는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를 외치는 가운데 터진 유 장관의 패가망신 행동은 온 나라를 수치스럽게 했고, ‘현대판 음서’의 존재에 국민은 허탈감에 빠졌다.

    그런데 정말 풀리지 않는 것은 ‘어떻게 유 전 장관이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기관에 딸을 근무시킬 생각을 했을까’라는 궁금증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상피조(相避條)를 보면 우리 조상은 일찍이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해 부자나 형제가 같은 관청에 근무할 수 없도록 법적 근거를 성문화해놓았다. 이러한 상피제도를 몰라 37년 외교관 경력이 부끄럽게 됐다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사시·행시·외시 3대 고시제도가 곧 폐지되는 상황에서 터진 ‘현대판 음서’의 부활은 얼마 남지 않은 고시제도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고시생들을 분노케 했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신림9동) 고시촌에는 “권력층과 부유층을 위한 고시 특채 폐지하라”는 현수막이 걸렸으며, 고시생들은 고시제도 폐지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고시제도 폐지 및 축소는 이미 몇 년 전에 결정돼 고시생도 엄연한 현실로 수용했으나 유명환 장관 딸의 어이없는 특채로 제도 개편에 부정론이 확산되고 있다. 1997~2003년 시행된 외무고시 2부 시험에서도 외교부 고위직 자녀들이 절반 가까이 선발됐다니 그동안 이런 특채 특혜는 오래된 관행이었음을 보여준다. 2012년을 끝으로 외무고시가 폐지되고 2013년부터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외교 전문 인력을 선발할 계획인데 이 시스템 역시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선발하니 특채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공정성과 투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공무원 선발에서 특채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만큼 차제에 공무원 선발 시스템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공채든 특채든 유능한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 땅에서 지난(至難)한 환경에서 내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가빈(家貧)해 기름을 구할 수 없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이룬 차윤(車胤), 손강(孫康)의 고사와 졸음이 오자 머리카락을 묶어 들보에 매단 손경(孫敬)과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른 소진(蘇秦)의 현두자고(懸頭刺股) 고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정한 사회’의 초석을 닦는 동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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