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4

2010.09.13

뜨는 전문직 드라마는 알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주인공으로 본격 등장…특정 상황 묘사 현실과는 달라

  • 신주진 드라마 평론가 joojin913@naver.com

    입력2010-09-13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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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는 전문직 드라마는 알고 있다!

    주방 요리사들의 일과 사랑을 그린 ‘파스타’는 직업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2004년 ‘파리의 연인’과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정점을 찍은 트렌디 드라마가 퇴조기에 접어들자,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갈증이 ‘전문직 드라마’에 강박적이리만큼 강한 요구로 나타났다. 전문직 드라마가 지지부진한 사랑 타령과 허무맹랑한 신데렐라 스토리를 일거에 날려버릴 대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문직 드라마는 사실 두 가지 상이한 장르의 기이한 조합에서 탄생했다. 하나는 전문직 드라마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트렌디 드라마 자체다. 10여 년간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를 이끈 트렌디 드라마는 여주인공의 사랑뿐 아니라 일이나 직장 등도 그렸다. 세련되고 젊은 도시 여성을 다룬 트렌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직업은 디자이너, 아나운서, 기자, 의사, 변호사 등 화려하고 번듯한 전문직이 대다수였다. 물론 그들의 직업세계는 여주인공 자체와 주요 테마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감각적인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파티셰’ 열풍을 일으켰던 ‘내 이름은 김삼순’은 이런 스타일의 전문직 드라마가 가진 강점을 가장 잘 보여줬다.

    다른 하나는 수사물, 의학물, 법정물 등이 많은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나 일본 드라마(이하 일드)의 영향이다. 뚜렷한 장르 관습과 규칙이 있는 이런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밀한 전문 직업인의 세계는 허울뿐인 국내 드라마의 전문직 모습과 비교가 됐다. 미드나 일드에 대한 질투 어린 선망이 국내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비난과 폄하로 돌아왔고, 그 결과 수많은 전문직 드라마가 탄생했다.

    그들만의 직업 세계 선망과 부러움

    사실 수사·범죄·의학·법정 등 장르 드라마의 직업 세계와 로맨틱 코미디, 멜로 등 트렌디 드라마의 직업 세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자의 경우 직업 자체가 드라마의 내용을 이루는 반면, 후자에서는 단지 상황이나 배경 설정용이기 때문. 따라서 미드나 일드의 장르 드라마는 ‘히트’ ‘식객’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산부인과’ ‘파트너’ 등 국내산 장르 드라마와 비교하는 게 옳다.



    즉 전문직 드라마는 트렌디 드라마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수사·법정·의학 등 장르 드라마의 발전에 대한 요구, 두 가지 모두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트렌디 드라마에서 장르 드라마의 전문직 내용과 묘사를 요구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스포트라이트’ ‘에어시티’ ‘로비스트’ 등의 실패가 이를 잘 말해준다. 방송국 기자 사회를 그린 ‘스포트라이트’나 인천국제공항을 배경으로 한 ‘에어시티’는 전문직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드라마 전체를 미궁에 몰아넣었다. ‘로비스트’는 전문직 드라마가 아닌 대하시대극인데, 전문직 드라마라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

    사실 모든 직업 세계가 사람들의 보편적인 관심과 흥미를 끄는 건 아니다. 그 자체가 삶과 죽음을 다루거나(의학 드라마), 죄와 벌을 그리거나(법정 드라마 · 범죄수사 드라마), 스포츠나 음악 또는 요리 같은 대중적인 관심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런 직업 세계는 전문직 드라마라고 묶일 필요 없이, 이미 각각 드라마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외과의사 봉달희’ ‘뉴하트’ 같은 국내산 의학 드라마는 미드식 메디컬 드라마(즉 장르 드라마)와 달리 병원이라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드나 일드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식 의학 드라마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전문직 드라마라는 제한적이고 과도기적인 용어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 용어 자체가 장르 드라마와 혼동을 일으키고, 트렌디 드라마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굳이 필요하다면 전문직 드라마 대신 ‘직업 드라마’라고 하는 게 낫다.

    흥미롭게도 직업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은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강박이 사라져갈 때쯤 트렌디 드라마 내부에서 나타났다. 주방 요리사들의 일과 사랑을 그린 ‘파스타’와 검사들의 삶을 그린 ‘검사 프린세스’가 그것이다. 이런 드라마는 딱히 요리 드라마나 법정 드라마라고 볼 수 없는, 주인공의 사랑이 중심 테마를 이루는 로맨틱한 트렌디 드라마다. 그럼에도 이 두 드라마가 직업 드라마라 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직업인으로서의 애환과 성장담을 담았기 때문. 그들의 사랑 역시 주방과 검찰청이라는 직업 공간에서 일하는 중에 이뤄진다. 일과 사랑이 긴밀하게 얽혀들면서 직업적 성장과 사랑의 성취가 동시에 이뤄지는 상호작용 과정이 탁월하게 묘사됐다. 여기에 조직과 개인 간의 갈등, 직장 안 권력관계와 직업윤리, 철학 등 직업 드라마적 요소까지 포함됐다.

    직업 드라마 등장은 바람직한 현상

    뜨는 전문직 드라마는 알고 있다!

    정치 판타지 드라마 ‘시티홀’에서 차승원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남자 주인공 ‘조국’역을 맡았다.

    소도시 시청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시티홀’과 명실상부한 직장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를 직업 드라마에 추가할 수 있다. ‘시티홀’은 고졸 출신 말단 공무원이 시장이 돼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내용의 보기 드문 정치 판타지 로맨스. 관행과 폐습에 물든 공무원 사회와 정치판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는 여주인공의 건강한 에너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현재 시즌 7까지 진행된 케이블 드라마인 ‘막돼먹은 영애씨’는 팍팍하고 구질구질한 직장인의 일상이 리얼하게 담겨졌다.

    물론 이런 드라마가 요리사나 검사, 공무원과 정치인 등의 직업 현실을 제대로 그리는지는 자주 제기되는 문제다. 시청자에게 편견이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직업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옥에 티’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다. 등장인물, 주제, 구성, 세부내용까지 전체적으로 살펴봐야지, 일부 직업 묘사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이런 직업 세계를 다루면서 드라마가 얼마나 넓고 깊어질 수 있는가다.

    어쨌든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논의와 요구는 우리나라 드라마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멜로물 또는 트렌디물 일색이던 국내 드라마시장은 다양한 장르로 분화됐다. 새롭게 시도되는 다양한 장르 드라마, 직업 드라마, 장르 혼종 드라마가 많이 등장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특히 TV를 시청하는 방식이 공중파, 케이블, 인터넷, IPTV 등으로 다양해지고, 시청층이 분화되면서 드라마 다양성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금은 확실히 탈(脫)멜로의 시대다. 전쟁도 갈라놓지 못한 절절한 사랑은 구시대의 유물로 남았고(‘로드 넘버원’), 가족 간 유대는 이권과 경쟁으로 찢겨나갔다(‘제빵왕 김탁구’). 복수극이 넘쳐나고 사랑보다는 생존이 중요해지는 이 시기에, 트렌디 드라마가 직업 드라마에서 출구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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