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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치인들은 왜 신뢰를 받을까?

‘흠 없는 인물’보다 ‘정직한 인물’선호 … 슈미트와 메르켈 獨 양심 대변 1, 2위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독일 정치인들은 왜 신뢰를 받을까?

독일 정치인들은 왜 신뢰를 받을까?

독일인들은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지만 메르켈 총리에게는 변함없는 지지를 보낸다(왼쪽). 혼돈의 시기에 독일을 이끈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여론조사를 계기로 재조명받고 있다.

8월 23일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은 생존하는 저명인사 중 ‘누가 독일의 양심을 대변하는가(Wer ist eine moralische Instanz fur Deutschland?)’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메르켈 정부 2기가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지난 상반기에 대통령이 바뀌는 등 독일 내외 혼란 속에서 여전히 독일인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 독일과 유럽연합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음을 국민 앞에 밝히고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연금과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 혜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사람, 국민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국제평화를 위해 독일 연방군을 세계 각처에 파병해야 하는 현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적격자가 누구인지 여론조사를 통해 ‘슈피겔’은 찾아보려 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연일 국민과 여론의 질타를 받는 정치권 인사가 최상위권에 포진했다. 반면 ‘사회의 목탁’이라 불리는 언론계, 종교계 인사는 하위권에 자리 했다. 전통적 권위들이 힘을 잃고 더는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도덕적 위상도 TV 퀴즈 프로그램 진행자인 귄터 야우흐(Gunther Jauch)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내 가톨릭교회가 1000년 이상 쌓아올린 신뢰와 권위가 수천 건의 아동 성학대 스캔들, 교회의 조직적인 스캔들 은폐 시도로 뒤흔들린 것이다.

‘사회의 목탁’ 전통 권위는 추락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교수, 문인 등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도 낮아졌다. 오늘 독일인들은 ‘지식인 집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그들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독일 사회는 그들을 필요로 했다. 과감히 불의에 항거하며 새 시대를 예견하는 그들의 목소리와 외침이 언론매체나 출판물에 담겼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곧 사상의 자유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터넷을 통해 매일 수만 건의 발언이 행해진다. 발언의 자유가 넘치다 보니 무책임한 발언을 남발하는 누리꾼, 악플러를 제어할 방법이 도리어 고민거리다. 사회가 다원화·전문화되니 두루뭉술한 지성인도 필요치 않게 됐다. 현대사회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할 뿐 심오한 철학자의 사상, 문예는 반기지 않는다.

여론조사 결과 1위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다. 무려 83%의 독일인이 그를 독일을 대표하는 도덕적 양심으로 꼽았다. 91세의 은퇴 정치인이며 TV 프로그램에서도 줄곧 담배를 피우는 그를 이토록 많은 독일인이 신뢰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 그는 독선적이고 거만하며 냉혈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난받았으나 한 세대가 지난 뒤 냉철하고 소신에 찬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꼽혔다.



슈미트 전 총리에게는 독특한 아우라도 형성됐다. 총리 시절 국내외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중에 영합하며 지그재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이미지가 있다. 독일인의 집단 기억에는 이러한 슈미트 전 총리의 모습만이 각인됐다. 재임 말기인 1980년대 초가 독일에 얼마나 어둡고 힘든 시기였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산처럼 쌓여가는 국채, 대량실업, 연금 재정의 고갈, 교육 문제 등이 있었지만, 당시 정치권은 이런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슈미트의 절친한 친구이며 시사주간지 ‘차이트(Die Zeit)’의 전 편집장인 테오 좀머는 1976년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썼다.

“슈미트-겐셔 정부 2기는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삐걱거렸다. 국민이 속았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정치권에 대한 냉소와 의기소침, 혐오가 전국에 퍼져 나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44년 전 상황을 묘사한 구절을 현 정부인 메르켈 2기 내각에 적용해도 매우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현재 독일인에게 광범위한 정치적 혐오와 냉소를 불러일으키는 메르켈 정부도 후대에 제대로 평가받을까?

후대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여론조사 결과 놀랍게도 메르켈 총리가 2위를 차지했다. 메르켈의 우편향적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던 독일인들이 이토록 후한 점수를 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메르켈에게는 슈미트가 지닌 관록과 연륜도 없다. 헌법재판관 유타 림바흐처럼 탁월한 지적 능력도 없고, 인권운동가 요아힘 가우크처럼 달변가도 아니다. 메르켈의 연설은 딱딱하고 정보 전달에 치중됐다.

독일인은 메르켈 정부의 우편향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정부가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독일의 이익에 부합하리라는 신뢰를 갖고 있다. 지도자가 신뢰를 받는 것은 그 나라에는 큰 복이다.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편집자 프랑크 쉬르마허는 “독일인은 관직과 그 직책을 맡은 사람을 분리해 생각한다”고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했다. 즉, 인간 메르켈이 도덕적 신뢰를 받는다기보다 독일인들은 자국 총리에게 기본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메르켈 외에도 현직 정치인 중에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노동부 장관과 구텐베르크 국방부 장관이 상위권에 자리했다. 폰데어라이엔은 최근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실업연금 감축 등 손대기 힘든 사안들의 주무장관임에도, 독일인들은 그의 도덕적 양심에 상당한 신뢰를 갖고 있다. 구텐베르크 장관 역시 아프간 파병 등 껄끄러운 사안의 주무장관이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에게 희생과 통찰을 요구했던 바로 그 두 장관을 독일인들은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유능한 인물이며, 해당 사안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알파 타입’ 신뢰안 해

정치인 외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자기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에게 독일인은 신뢰를 보낸다. 남아공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의 세대교체에 성공해 전 세계에 젊은 독일 이미지를 심어줬던 요아힘 뢰브 감독,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선수 필리프 람이 있다. 특히 음주운전 물의가 일자 미련 없이 독일 루터교 최고 수장 자리를 벗어던진 마르고트 캐스만이 교황 베네딕토 16세보다 독일인에게 큰 도덕적 신뢰를 받은 사실은 시사하는 바는 크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흠 없는 인물’이 아니라, 과오를 시인할 줄 아는 정직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시사점은 독일인이 카리스마 넘치는 ‘알파 타입’ 인물에는 큰 신뢰를 갖지 않는 점이다. 프랑스 극우파 지도자인 르펜, 네덜란드 반(反)이슬람 정당 지도자인 페어트 윌더스 등의 유형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특히 아돌프 히틀러를 경험한 뒤 독일인의 몸에는 ‘의심 유전자’가 심어졌다. 대중에 영합하고 선동적인 인물을 일단 의심하고 본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화려하게 조명받는 대중스타가 출현하기도 어렵지만, 사회 전체가 광풍에 휩싸인 듯 요동치는 일도 보기 힘들다.

‘슈피겔’의 여론조사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일인이 어떤 유형의 지도자를 신뢰하는지 드러났다. 비슷한 질문을 한국인에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분의 말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는 ‘어른’이 우리에겐 있나?



주간동아 2010.09.13 754호 (p60~61)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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