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1

2010.08.23

행정고시 너마저 ‘배신’ 때리냐

60년 만에 폐지 수험생들 ‘당황’ … 내년부터 당장 합격자 줄어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0-08-23 14:1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너무 갑작스럽다. 사전에 논의나 의견수렴 과정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디 있나.”(행정고시 수험생 김모(24) 씨)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끝났다. 해외 유학파, 대학원 석·박사, 법조인 등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 성공하는 길은 넓어지고, 평범한 사람이 성공하는 길은 좁아지는 것 같다.”(지난해 행정고시 합격자 유모(25) 씨)

    행정고등고시(이하 행시) 수험생들이 울상이다. 8월 12일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가 60년간 지속해온 공무원 채용 방식을 대폭 개선하는 방안을 발표하면서 ‘5급 공무원=행정고시 합격’이라는 등식이 깨졌기 때문이다. 행안부는 행시의 ‘고시’ 대신 ‘5급 공채’라 명칭을 바꾸고 5급 전문가 채용시험을 도입해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와 경력자를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내년에는 선발 정원의 30%, 2015년부터는 50%를 외부 전문가로 채울 계획이다. 전문가 채용은 특별한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평가하며 전문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했거나 경력을 쌓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현재의 400여 명(일반직과 특수직 포함)인 신규 공무원 수요 선을 유지한다면 일반 공채 인원은 내년에는 30명, 2015년 이후에는 100명가량 줄어든다.

    다양한 전문가와 경력자 선발

    행시 수험생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은 당장 내년부터 합격자 인원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정부가 발표한 대로 최종 합격자는 30명이 줄지만 1차 필기시험 선발 인원은 10배수인 300명이 줄기 때문에 수험생이 느끼는 수치 차는 크다. 2년째 행시를 준비 중인 김씨는 “보통 행시에 최종 합격하는 데 3, 4년이 걸린다. 최소 4, 5년 뒤부터 개편안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 사법고시와 외무고시도 유예기간이 있었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수험생 천모(25) 씨는 “면접은 말할 것도 없고 서류전형은 학력과 영어 정도가 평가할 수 있는 지표인데 공정성이 보장될지 의문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행시 수험생 가운데는 정부가 2012년 배출되는 로스쿨 졸업생을 수용할 방안으로 행시 채용 방식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반면 좀 더 기다려보자는 수험생도 있다. 김모(23) 씨는 “행시 공고가 나기 전까지 개편안을 변경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재작년에도 이명박 정부가 공무원 인원을 줄인다고 해서 행시 준비생들이 겁을 먹었는데 오히려 선발 인원이 10% 정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처럼 개편안에 대한 수험생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행안부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정원의 절반을 선발하는 시기가 빨라야 2015년 이후이기 때문에 4, 5년의 유예기간이면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행안부는 9월경 공청회 등을 통해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올해 하반기까지 대통령령 개정을 끝내고 내년에 제도를 시행할 계획이다.

    갑작스럽게 채용 인원이 줄어든다는 수험생들의 지적에 대해 행안부 김동극 인력개발관은 “지난해 신규로 들어온 전문가 특채가 27.6%였다. 내년에 30%로 늘어난다고 해도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50%까지는 차차 늘릴 예정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 지금 상태로만 보면 내년 공채 인원이 20~30명 줄어들겠지만 고시 채용 인원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그간 신규채용이나 조직 운영을 긴축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내년 인력구조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현재 전문가 특채는 각 부처에서 산발적으로, 수시로 진행해 전문가들이 정작 채용 소식을 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행안부는 내년부터는 전문가 역시 특정 시기에 뽑게 되므로 우수한 전문가가 지원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개편안을 마련한 취지는 크게 세 가지다. 행안부의 발표에 따르면 2009년 공채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위공무원단이 70.6%, 3급 과장급이 57.6%다. 이렇다 보니 출신 학교가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인재끼리 모여 조직 분위기가 경직된다는 문제가 자주 제기됐다. 또 고시에 합격한 뒤에는 조직 내에서 승진과 출세가 보장되므로 공무원들이 자체 경쟁력을 키우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다. 시대와 행정환경이 다원화, 복잡화되는 현실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됐다.

    민간의 우수한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공직으로 유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로펌과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법조인이 공직으로 들어오는 경우다. 현재 정부 부처 31곳에서 200여 명의 변호사가 근무하고 있다. 정부는 사법고시 합격자 1000명 시대를 맞아 판·검사 임용을 제외하고 민간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우수한 인재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국민대 행정학과 조경호 교수는 “사법고시 합격자는 물론 로스쿨 졸업자, 석·박사 출신 등 각계각층의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문제인 고학력자의 취업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공시족(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고시폐인과 같은 신조어가 범람할 정도로 많은 젊은이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현실도 반영됐다. 행안부는 국가적으로 인재의 손실을 줄이고 대학 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각오다.

    변화의 바람 vs 우수 인재 안 온다

    반면 전문가나 현직 종사자들로부터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정부가 기대하는 것보다 우수한 인재가 몰릴 가능성이 낮다는 것. 박사, 로스쿨 출신 등의 전문가 연령이 30대, 특정 분야에서 오랜 경험과 기술을 쌓은 경력자의 연령이 40대라고 예상했을 때 공무원 5급의 근무여건과 보수가 그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분석이다. 연세대 행정학과 이종수 교수는 “민간 기업과 학계의 보수나 여건이 더 낫다. 지원율 자체는 높겠지만 공채와 비교했을 때 턱없이 실력이 부족한 인재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현재 고위공무원의 경우 개방형 임용제를 통해 민간 전문가를 채용하고 있다. 사무관 B씨 역시 “공채 출신 고위공무원 상당수가 이번 개편안에 회의적이다. 민간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굳이 들어오겠느냐는 반응이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전문가로 채용될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점도 지적된다. 예를 들어 특정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대학 졸업 후 최소 5년이 소요된다. 공부를 하며 연구소에서 일한다 해도 수입이 적어 학위를 취득하려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계명대 행정학과 김복규 교수는 “취업이 어려운 상황인 만큼 학위를 따서 공직에 들어가려는 젊은이가 늘어날 수 있다. 결국 경제력에 따라 기회 여부가 갈리는 것이니 빈부격차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 공채시험 공무원 제도부터 손을 대자는 주장도 있다. 행시가 많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여전히 3차에 걸친 시험방식 모두 수험생의 사고 체계를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이 교수는 “영국은 거의 일주일에 거쳐 3차 시험을 치른다. 수험생에게 정책 과제를 내주고 정책을 개발해 프레젠테이션하게 하는 등 문제해결 능력을 평가한다. 우리도 3차 시험을 수험생의 역량을 실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 교수는 제도 개편을 논하기 전에 공무원 사회 내 어두운 부분부터 고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무원이 직무능력이 부족하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를 경우, 적격성을 엄격하게 평가하는 등 공무원 안정주의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