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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관세청 두드리면 돈이 보인다③

관세청, 경제발전 역사와 동행

올해로 개청 40돌 중년으로 성장…1878년 부산 두모진 해관이 첫 세관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관세청, 경제발전 역사와 동행

관세청, 경제발전 역사와 동행

1 1970년 8월 27일 남덕우 재무부(오른쪽)과 이택규 초대 관세청장이 관세청 현판을 걸고 있다. 2 1970년대 밀수 근절 가두 캠페인 모습. 3. 밀수 보석을 암거래한 부인들의 공판 모습.

“정부는 관세청의 개청식을 25일 오전 10시 뉴슈퍼마케트 건물 7층에서 갖고 업무를 시작하기로 했다.”(‘동아일보’ 1970년 8월 18일자 중에서)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치사를 통해 관세청 발족을 계기로 의욕과 창의력을 발휘, 퇴폐적이고 폐쇄적인 행정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택규 청장은 지난날의 오명을 일소하기 위해 기강 쇄신에 역점을 둘 것이며 범칙사범 처리 과정에서의 부당한 외부압력은 직을 걸고 막아 예외 없는 관세행정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경향신문’ 1970년 8월 27일자 중에서)

1970년 8월 27일 관세청은 서울 중림동 서울역 뒤편 ‘뉴서울 슈퍼마켓’ 7층 건물을 임대해 중앙행정기관으로 개청했다. 당시 폭증하는 수출입 물동량을 재무부 세관국으로선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962년 4억8000만 달러였던 수출입 물동량은 관세청이 개청하던 1970년 들어 28억 달러로 늘었고, 관세 징수액도 68억 원에서 509억 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관세행정도 그만큼 수요가 넘쳐났다.

당시 언론 보도처럼, 세관 직원과 조직폭력배 등이 연루된 ‘특공대 밀수’ 같은 부조리 사건이 연일 터지면서 세관의 근무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도 있었다(상자기사 참조).

관세청은 산업구조 고도화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 등에 발맞춰 수출용 원자재에 대해 세금을 낮추고 관세환급제를 도입하는 등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지금까지 정부의 수출입 정책을 지원하는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수출 드라이브·수입 자유화 정책과 보조

이대복 현 관세청 차장이 펴낸 ‘세관 역사 한눈에 꿰뚫어보기’에 따르면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은 ‘공항세관의 친절한 통관절차 이행’을 지시했고, 김포공항 세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급여와 맞먹는 월 5만 원의 공항 근무수당을 지급했다고 기록돼 있다.

1980년대는 국내 시장을 개방하고 수입자유화를 추진한 정책에 맞춰 조정관세제도(값싼 외국의 제품이 마구 수입돼 국내 생산자들이 피해를 입을 경우 이를 보호하기 위해 관세율을 일정 기간 상향 조정하는 제도)를 도입했고, 1990년대에는 무역수지가 적자로 반전되자 통관절차를 간소화해 물류 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1994년에는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로 농수축산물 개방이 불가피해지자 탄력관세를 도입, 국내 산업 보호에 나섰다. 김기동 사무관의 설명이다.

“이 시기는 모든 분야의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불법 부정무역과 밀수, 위장수입 사례가 급증하던 시절이었다. 관세청은 원산지표시 품목을 확대해 국내 농어민 피해를 줄여나갔다. 1996년 7월에는 그동안 지속해온 수출입 ‘허가제’에서 수출입 ‘신고제’로 전환하면서 관세행정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묄렌도르프는 첫 관세청장 겸 밀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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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선 대내외적으로 빠른 환경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인터넷수출입신고시스템(Uni-pass) 구축과 세관선진화 5개년 계획 수립, 세계관세기구(WCO) 아시아 태평양 지역 의장국 선임(2008년 6월), AEO 통합관리시스템 구축 등으로 관세행정의 위상을 높였다. 현재도 FTA(자유무역협정) 지원 등 대한민국 경제발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관세청 역사는 대한민국 경제발전 역사였지만, 그 이전 역사를 올라가면 다난했던 한국사와 맥을 같이한다.

우리나라 첫 세관(당시는 해관)은 1878년 9월 28일 현재의 동구 수정동에 설치된 부산 두모진 해관이었다. 당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항이 개항하고 국제 정세에 눈뜬 조선 정부는 두모진 해관을 설치하지만 일본의 반발로 3개월 만에 폐관했다. 따라서 관세청은 1883년 6월 16일 창설된 인천세관(해관)이 사실상 우리나라 근대적 세관의 효시라 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세청장(관세행정의 총책임자)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사진). 청나라 리훙장의 권유로 1883년 5월 총세무사에 임명돼 세관 창설 운영을 담당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묄렌도르프는 우리나라 최초의 밀수범이기도 하다.

중국 만주지역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예슈셩교젼셔’를 편찬했지만 육로를 통해 반입이 어려워지자 1884년 서상륜과 이성하는 한밤중에 묄렌도르프를 찾았다. 묄렌도르프 역시 개신교도였던 것. 그는 인천 해관창고에 있던 ‘예슈셩교젼셔’를 꺼내 해관장 사택으로 ‘밀수’했고, 성경을 조선에 보급하는 데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예슈셩교젼셔’는 서북지방으로 퍼져나가 기독교 전파의 디딤돌이 됐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밀수품

쌀과 콩부터 아편·여우 생식기까지 다종 다양화


관세청, 경제발전 역사와 동행
개항 이후 통관체제가 부실하던 시절에는 쌀·콩 등의 밀수출이 빈번했고, 1894년 이후에는 백동화가 통용되면서 제조용 금괴 밀수가 성행했다. 성냥과 아편도 당시 주요 밀수품목. 광복 이후에는 물자부족과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용품 밀수가 성행했는데, 중국인들의 고추, 담배, 대두 밀수입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맥주와 비료, 약품 밀수도 많았다. 1950년대에는 군복 잠바 등 미군수품이 부정 유출되고 탄피와 미국달러 등이 밀반출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즈음 ‘대한민국 밀수사’에 한 획을 긋는 이른바 ‘특공대 밀수’가 고개를 든 것.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본거지를 두고, 공해상에서 어선으로 위장한 밀수선끼리 만나 일본 상품이나 금괴, 마약 등을 은밀히 부산항으로 들여온 것이다. 전 부산세관장 조준 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 부산, 마산, 여수를 3대 근거지로 삼고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거점으로 거의 공공연하게 밀수가 자행됐다. 특공대 밀수에는 권력기관원과 폭력배가 결탁한 경우가 많았는데, 품목은 화장품과 직물, 약품, 학용품 등이 주였다. 밀수품은 부산 국제시장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팔렸다. 특공대 밀수꾼들의 배는 30노트로 대마도를 오갔지만 세관 감시선은 겨우 18노트여서 밀수꾼들은 코웃음을 쳤다. 당시 이즈하라항은 30여 척의 밀수선이 버젓이 정박했고 유흥주점과 여관은 밀수경기로 불야성을 이뤘다.”

1965년 한·일 수교로 공식적인 교역이 시작되면서, 일본에 수산물을 수출하는 어선과 냉동선이 밀수의 주요 경로가 됐다. 일본에 수산물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선원들이 일본산 TV·밥솥 등 전자제품과 금괴, 녹용 등을 냉동선 비밀창고에 싣고 부산으로 들어오는 식이었다.

1960년대에는 화장지와 오리엔트 시계, 양주, 커피, 트랜지스터, 파커 만년필 등이, 70년대에는 금괴와 컬러TV, 오디오, 녹용, 일제 재봉틀이 주종을 이뤘다. 항공기 승무원이나 부관훼리호 여행자를 통한 밀수도 성행했다.

1980, 90년대는 금·보석·녹용·시계 등 전통적 밀수품목 외에 식음료와 골프클럽, 비디오카메라, 상아 제품 등으로 다양화됐다. 밀수출은 여행자에 의한 외화 밀반출과 필로폰이 주류를 이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참깨와 발기부전치료제, 중국산 고추 등이 주요 밀수품이 됐다. 최근에는 ‘부적용 여우 생식기’(사진)까지 밀수되는 현실이다.




주간동아 2010.08.23 751호 (p26~27)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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