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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20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1 효릉의 장명등 창호로 바라본 조산(朝山), 언덕 위에 클럽하우스가 보여 원경관을 해치는 것이 아쉽다.

효릉(孝陵)은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과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 나주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동원쌍릉으로 왕의 능침은 병풍석, 왕비 능침은 난간석으로만 돼 있는데 조선의 능 중 유일한 형태다. 효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의 서삼릉 지구 서쪽 축협 종축장 능선에 있다. 오른쪽으로는 조선 왕실의 왕자와 공주, 옹주, 후궁의 묘와 태실묘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전국 길지에 있던 것들을 강제로 옮겨다 놓았다.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지극한 효성

1515년(중종 10) 음력 2월 25일 밤 초경(初更·저녁 7~9시)에 장경왕후 파평 윤씨가 원자(인종)를 낳았다. 다음 날 영의정 정광필 등 백관이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축하의 예와 함께 ‘거룩한 모습으로 하늘의 복을 받아 국가의 큰 경사이며, 천년의 좋은 운수를 받아 큰 이름 무궁토록 밝히고 종실에 영원토록 많은 복이 있기를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중종은 다음과 같이 큰 기쁨을 말했다.

“조종의 일에서 제사 이을 아들을 얻은 것보다 큰일이 없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웅몽(熊夢)의 상서(꿈에 곰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길한 조짐. ‘詩經’의 소아(小雅), 사간(射干) 내용)’를 얻지 못해 근심하고 있었는데 정비가 원자를 낳으니 어찌 나 한 사람만의 경사냐. 만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겠다. 만대의 계획을 굳건히 하고 때 묻은 것을 깨끗이 씻고 유신에 함께 참여하자고 호소한다.”

중종에게는 10명의 비와 빈이 있었으나, 즉위 후 10년이 지나서야 기다렸던 후계자가 탄생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7일 후 이른 새벽, 중궁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갖 정성과 공을 들여 탄생한 핏덩어리 인종에게 어미 없는 왕실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인종은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 3세에 글을 깨치고 6세에 세자로 책봉됐다. 성품이 조용하며 공손, 인자하고 효성과 형제와의 우애가 있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며 소차(疏箚·작은 상소문)라도 친필로 극진히 답하고, 궁녀들도 멀리해 궁위가 엄숙했다. 그래서인지 후사가 없었다.

효자인 인종은 부왕이 편찮을 때는 관대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모시고 친히 약을 달여 반드시 먼저 먹어보고 드렸으며, 즉위한 뒤에도 경복궁에서는 중종의 흔적이 있는 곳곳을 일일이 가리키며 슬퍼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한밤중에 불이 난 것을 두고 사가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꼬리에 솜방망이 불을 붙여 동궁으로 들여보내 순식간에 불이 나자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의 짓임을 직감하고 자신을 길러준 계모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해 꿈쩍 않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된다고 생각해 불길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25년간 세자 교육을 철저히 받은 인종이 30세 되던 해, 부왕 중종이 재위 39년 만에 승하했다. 인종은 땅에 엎드려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대비인 문정왕후가 상례를 주관하니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일반적으로 선왕 승하 후 사왕(嗣王·후임왕)이 3일 안에 즉위하는데, 엿새째 되는 날 신하들이 인종에게 즉위를 권유했음에도 사양을 거듭하다 결국 저녁이 돼 빈전 앞에서 유고(遺誥)와 어보를 받고 창경궁에서 촛불을 밝히고 즉위했다.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2 성품이 조용하고 공손, 인자하며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종의 효릉. 3 초지가 된 능선의 복원이 필요하다. 소나무는 1970년대 개발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의 즉위식은 왕궁의 정전 문 앞에서 거행되는 것이 관례로, 이날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문 앞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인종은 승여(乘輿)도 거부하고 어좌에 이르러 차마 앉지 못했다. 저녁때라 시간을 재촉하는 신하들의 권고에 불안한 자세로 어좌에 올랐으나, 슬픔으로 눈물이 비 오듯 하니 모든 신하가 오열했다. 즉위식이 끝나자 인종은 바로 면복(冕服·면류관과 곤룡포)을 벗고 최복(衰服·상복)을 입었다. 인종의 품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일 세자빈 박씨는 특별한 의식 없이 왕비에 올라 사직, 영녕전, 종묘, 영경전에 즉위를 고했다.

효자 인종은 5개월의 장례 기간에 음식을 가리고 육식을 멀리해 몸이 허약해졌음에도 아버지 중종의 주다례를 올리고 문정왕후 대비전에 문안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신하들이 임금의 옥체가 강령하지 못하고 날씨가 매우 더워 중병이 생길까 우려했으나 듣지 않았다. 95년 전 세종이 승하했을 때 효자 문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얼마 후 인종은 인(仁)을 베푼다는 이유를 들어 대사면 교서를 내린 뒤 기절했다. 이후 깨어나서는 여러 재상 앞에서 자신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문정왕후의 아들이며 자신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한다는 전교를 내리고, 다음 날인 1545년 7월 1일 경복궁 청연루(淸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했다. 인종은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았으나 상중에 너무 슬퍼해 재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하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펼쳐볼 기회도 없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경원대군은 12세로 너무 어려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인종의 국장도 문정왕후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상주인 경원대군은 상례를 친행하지 않았다. 생모인 문정왕후의 지시였을까, 아니면 어리다는 핑계였을까? 93년 전 문종 승하 때 어머니 없는 12세의 단종이 친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종이 승하하던 날 문정왕후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창덕궁에서 정궁인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날 도성 안에 “괴물이 밤에 다녀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 수레 지나가는 소리가 성 안을 진동해 인마가 놀라 휘돌아다니데 도성의 군졸들이 막을 수 없었다”고 전해온다. 어진 임금의 승하와 문정왕후의 정권욕을 비웃는 민중의 반란으로 해석된다. 임금의 소렴은 승하 3일 후가 원칙이나 문정왕후와 영의정 윤인경 등은 승하 다음 날로 서둘렀다. 중전 박씨가 인종의 용안이 옥색임을 보고 인종이 “내가 죽거든 사흘 동안 염하지 말라”는 유교를 남겼다고 하며 소렴을 미루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문정왕후는 강행했다. 후손 없는 인종의 장례는 서둘러 진행됐다.

대비가 윤인경 등에게 중종과 장경왕후를 모신 고양의 정릉(靖陵) 근처를 살피게 했다. 정릉 백호 능선 너머의 아름다운 곳이 인종의 유교라 하고 “간목산(艮木山) 아래에 간좌곤향(艮坐坤向·남서향)이고 득수득파(得水得破)는 묘득신파(卯得申破·동에서 나와 서로 흐름)이다. 청룡은 겹겹이 쌓이고 백호는 세 겹으로 감싼 형국이며, 내청룡이 감아돌아 앞을 감싸는 안대(案帶)가 됐으며, 수구가 막혔고 형혈(形穴)로 분명히 아름답고 흉함이 없는 길지의 형세”라 하며 이곳으로 정했다. 묘호는 그가 생전에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따서 인종(仁宗)이라 하고, 능호는 품성을 따서 효릉(孝陵)이라 했다.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4 인종의 능침은 병풍석, 인성왕후의 능침은 난간석만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유일의 형태다. 5 효릉의 고석.

인종의 비 인성왕후 나주 박씨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1세에 세자빈이 됐으며, 인종 즉위 시 왕비에 올랐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인종 사망 후 대비로 32년 더 살다가 선조 10년(1577) 11월 28일 64세로 승하해 인종 왼쪽에 비워놓았던 왕비릉 자리에 안장됐다.

효릉은 ‘국조오례의’에 의한 상설제도를 따랐으며, 난간석으로 왕과 왕비의 능이 연결돼 있다. 왕의 능침에는 병풍석이 둘러쳐 있고 비의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세워져 있다. 인종의 능침은 원래 세조의 유시를 따라 난간석에 회격실로 조영됐다. 30년 후 인성왕후를 안장하고 다음 해(선조 11년) 임금인 선조가 백부인 인종의 효심, 형제애를 기리며 재수축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으로 공들여 조영했다. 그러나 인성왕후의 능침은 난간석만 만든 조선시대 유일의 형태다.

원경과 근경의 축 개념이 확실한 능역

25년 세자… 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6 장명등 창호로 본 효릉의 문석인.

병풍석에는 운채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기타 석물은 일반 상례와 같다. 조선 왕릉은 장명등의 창호로 조산(朝山)을 바라보면 조산 또는 안산의 봉우리와 연결되는 자연의 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릉의 장명등 창호에 들어오는 모습은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다. 조선 왕릉의 특징인 축선의 원경관이 훼손됐다. 그러나 중계의 장명등 좌우 창호로 보이는 문석인의 모습이 재미있다. 효릉은 조선의 왕릉 중 원경과 근경의 축 개념이 확실한 능역으로 평가된다.

정자각 전면의 오른쪽에는 동자석 모양의 석물이 하나 있다.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인종 능역 조영 때의 불량품인지, 아니면 인성왕후 능역을 조영할 때 만들어진 것인지, 또 다른 능제시설인지,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 같아 궁금하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숙종 30년(1704) 1월 효릉에 산달(山獺·너구리, 담비, 족제비를 칭함)이 나타나 수라간의 구도(溝道·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자, 노복인 주명철이 불을 지펴 연기를 뿜어 넣어 잡으려다 그만 화재를 내 능상까지 불이 번지자 도망가 숨어버렸다. 이 사실은 즉각 조정에 보고됐고 결국 삼성추국(三省推鞫·최고기관에서 심문) 끝에 해당자는 사형을 당하고 가족과 관리자, 참봉 등 관리인들은 천민으로 강등돼 귀양을 갔다. 이런 변고로 임금은 정전에 들지 않고 3일간 업무를 중단하고,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국상이나 제례 때 입는 엷은 옥색 제복)을 입고 위안제를 올렸다.

이렇게 능역에 불을 내면 큰일이 났다. 조선 518년 동안 철저하고 엄격하게 관리해온 왕릉의 능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국가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됐다. 특히 효릉은 1970년대 축산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좌우 능선과 주변을 국립종축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초지를 조성하고 전면부와 주변의 능역을 골프장으로 개발한 까닭에 세계유산에서 제외될 뻔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이 연속유산(serial nomination)으로 인정받으려면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해야 유리하다는 의견에 따라 이 능도 포함됐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이렇게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복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효릉 주변의 지형, 연지, 금천교, 수복방, 수라청 등도 시급히 복원해야 한다.

2009년 조선 왕릉에 이어 올해에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문화적 쾌거다.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세계인에게 자랑하려면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관광객이 찾아온다.



주간동아 2010.08.09 749호 (p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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