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9

2010.08.09

선행학습, 사법연수생도 삼켰다

사시 합격 후 입소 유예 성적 올리기 … 등수 따라 임관 좌우가 불러온 현상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0-08-09 12: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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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행학습, 사법연수생도 삼켰다

    올해 1월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39기 수료식. 취업률은 55.6%로 집계됐다.

    지난해 사법시험(이하 사시)에 합격한 A(26)씨는 올해 사법연수원에 등록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처럼 연수원 입소를 유예한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에 한창이다. 공부 과목은 민사재판실무, 형사재판실무, 검찰실무 등으로 연수원에서 배우게 될 과목이다. 친구들 중에는 이미 동영상과 학원을 통해 연수원 예비과정을 수강한 사람도 있다.

    B(24)씨는 사시에 합격했지만 입소를 연기하고 동남아 여행을 계획 중이다. 1년이라도 일찍 사회에 발을 내딛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고시 생활보다 더 빡빡하다는 연수원 생활에 몰입하려면 일단 심신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02년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가 열린 이후 연수원 입소를 연기하는 합격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2008년 합격자 중 입소를 유예한 인원은 170명(40기), 지난해 합격자 중 유예 인원은 173명(41기)으로 2002년 33명(33기)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수치다. 이 중에는 학업, 입대 등 부득이한 사유로 입소를 연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연기한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판검사로 임용되거나 대형 로펌에 들어가려면 사시 성적과 연수원 성적을 합한 결과가 상위 20%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 통상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좋은 점수를 받아 상위권에 들기 위해 선행학습을 하려는 사시 합격자가 늘고 있는 것. 사법연수원 2년차인 C(28)씨도 1년을 유예한 뒤 연수원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많은 합격생이 판검사를 선호한다. 진로를 뚜렷하게 정하지 않은 경우에도 진로 선택권을 넓힐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예습을 한다”고 귀띔했다.

    다시 학원 등록 그들은 여전히 고시생



    대법원이 사시 합격자 수를 늘린 것은 1981년 사시 23회부터다. 이전까지는 본인이 원하면 임관이 가능했지만 23회부터 300명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변호사나 로펌으로 진로를 택하는 것이 흔치 않아서 성적 우수자 대부분이 임관을 택했다. 법무법인 화우의 김남근 변호사는 이러한 관행이 30년 가까이 이어져왔다고 분석한다. 그는 “성적이 좋은 사람이 임관을 택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다. 변호사를 하더라도 판검사를 한 뒤에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인식과 관행도 여전하다”며 이 같은 현상의 배경을 설명했다.

    사실 신림동 고시학원가에 사법연수원 예비과정이 생긴 것은 수년 전부터다. 상당수 사시 합격자가 합격자 발표 이후부터 입소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예습을 한다. 고시학원 관계자들은 사시 합격자가 학원에서 예비과정 수업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요즘은 이것도 모자라 아예 연수원 입소를 유예하며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취업률이 낮아지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합격자가 늘어 연수원에서의 경쟁이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생 취업률은 39기가 55.6%(2010년 1월 초 기준 취업대상인원 대비 취업률)로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진로를 확정하지 못하고 연수원을 떠났다. 연수생 2년차인 D(30)씨는 “20여 명이 한 조인데 그중 5~6명이 유예했다가 들어온 사람이다. 유예를 했던 친구들이 성적이 더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선행학습, 사법연수생도 삼켰다

    사법연수원 내 도서관에서 연수원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법연수생은 판·검사 임용을 희망한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다. 3, 4월은 반별·조별 모임, 체육대회를 비롯해 회식 등이 많아 공부할 시간이 자연스레 부족해진다는 것. B씨는 “동종업계에서 일할 사람들과 인맥을 쌓는 기회인데 혼자 공부벌레처럼 지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공부에 소홀할 수도 없다. 미리 공부를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가 수월할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연수원이 합산하는 연수원 총 4학기의 성적 중 1년차 1학기 성적의 반영 비율이 가장 낮지만, 상대평가인 만큼 공부에 소홀할 수 없다. 1년차 성적이 발표되면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 대형 로펌에서 러브콜을 보내기도 한다. 연수원 41기인 E(26)씨는 “6월 말에 첫 시험을 치렀는데 공부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히려 그 다음 학기에는 예습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연수원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1학기는 예습을 한 학생이 확실히 유리하다”고 귀띔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유예를 선택했다는 이들도 결국 ‘성적’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다. 2007년 합격한 F(27)씨는 유예를 선택해 사시 공부에 지친 마음과 체력을 회복한 뒤 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자 재충전을 선택했던 것이다. 한양대 법대 박찬운 교수는 “법조인의 소양을 쌓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나쁠 게 없다. 다만 연수원 교육조차 성적지상주의에 휘둘리는 것이 문제다. 단순히 선행학습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자신이나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충고했다.

    연수원 교육과 임관 방식 개선 필요

    그러나 이러한 선행학습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해 입소한 40기 G씨는 “예습을 하면 도움은 되겠지만 1년씩 유예할 만큼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지난 2월에는 대법원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사법연수원 수료자를 곧바로 법관으로 임용하는 방식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입법이 완료된 후 연수원에 입소하면 곧바로 법관에 임용될 수 없는데, 왜 굳이 그런 불확실한 상황을 감수하면서 유예를 택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단순히 선행학습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고 적극적으로 진로를 탐색하고자 입소를 유예하는 경우도 있다. 공익변호사단체, 시민단체 등 여러 기관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것이 그 예다. F씨는 “연수원에도 법원, 검찰, 변호사 실무 실습 시간이 있지만 스스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기관에서 인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에는 매년 입소 유예자 1~2명이 문을 두드린다. 연수원 프로그램에도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입소 전에 여유를 가지고 경험하기 위해서다.

    김남근 변호사는 오로지 임관을 목표로 선행학습을 통해 성적을 올리려는 분위기와 합격생들의 경향에 우려를 표하며 “판사, 검사, 변호사 세 분야에 골고루 좋은 자원이 투입돼 활동하는 것이 법조계나 사회 전체를 봐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찬운 교수는 근본적으로 사법연수원 교육, 임관 방식의 방향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수원이 단순히 법률지식을 향상시키는 곳이 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실상은 연수원생들의 성적을 최고 가치로 여기고, 그 성적에 따라 일생이 좌우되는 분위기다. 대법원의 법관임용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 법조 경력자를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 제도가 시행되는 등 성적이 아닌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이 임관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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