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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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희망과 나눔’을 사러 간다

복권에 담긴‘사회경제학’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0-07-26 13: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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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희망과 나눔’을 사러 간다
    때는 1988년 7월 고려대 경제학과 미시경제학 시험장. 당시 강의를 맡았던 이학용 교수는 학기말 시험문제 중 하나로 다소 황당한 문제를 냈다.

    ‘복권의 경제적 효용성을 논하라.’

    칠판에 문제가 쓰이자 강의실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수업을 열심히 들은 일부 학생은 이 교수가 평소 복권의 경제성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을 눈치채고 준비를 했지만, 대다수 학생은 그가 쓴 책 ‘미시경제학’만 달달 외웠다가 경을 쳤다. 사학과 2학년이면서 경제학을 부전공했던 나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속했다. 서걱서걱 넓은 시험지에 온갖 그래프를 그리며 답안을 작성하는 성실파 학생을 보며, 나는 짤막하게 답을 써놓고 강의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복권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때 기자가 작성한 답안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복권은 국가가 서민의 주머니를 털어 모자란 세금을 조달하는 준(準)조세적 성격이 강하므로, 그 경제적 효용성은 논할 수 없다. 복권이 많이 팔릴수록 정권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노태우 정권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던 나는 당시 발행되던 유일한 복권인 올림픽복권을 사는 이의 대부분이 단 한 번에 인생역전이나 내 집 마련을 노리는 서민이었고 부자는 잘 사지 않는 점, 실제 올림픽복권 판매금이 정부의 세금으로 지어져야 할 올림픽경기장과 국가유공자의 주택 마련에 쓰인 점 등에 주목했다. 당시 올림픽복권 한 장 값인 500원이면 막걸리 몇 사발에 닭발 안주 서너 점을 먹을 수 있었다. 어쨌든 점수는 재수강이 불가능한 점수대에서 최하. 성적표에는 교수의 분노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런 아픈 경험 때문일까.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하고 취직하는 사이 복권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복권 시험’ 이후 10년의 세월 동안 올림픽복권은 사라지고 주택복권이 재판매되고, 동전으로 박박 긁어 당첨 여부를 알아보는 즉석식 복권,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한 기술복권, 복지복권, 기업복권, 자치복권 등 이름도 다 열거할 수 없는 복권이 난무했지만 내 주머니에 복권 살 돈은 없었다. 솔직히 ‘당첨되지도 않을 복권을 왜 사는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일이 내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던 그 시기, 인생의 쓴맛을 알아가던 나는 하늘과 행운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챘다. 복권 한 장 사는 일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팍팍했다.

    기자 생활 10여 년이 넘어가던 2000년대, 신문지상에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복권에 대한 비판 기사가 쏟아졌다. 복권 발행 주체들의 과당경쟁으로 복권의 유통비용만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라인복권 이야기가 들리더니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2002년 12월 로또라는 복권이 나왔다. 외신에서 들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복권. 복권에 당첨되면 억만장자가 된다는 그 복권이었다. 이미 중견기자가 된 나로서는 매주 1만 원의 투자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매주 터지는 1등 몇백억 원의 소식. 호기심에 매주 샀는데 3~4주쯤 되자 숫자 6개 중 4개가 맞아 4등을 했다. 내 손에 떨어진 돈은 20여만 원. 후배들 밥 사주고 남은 몇만 원으로는 로또를 샀다. ‘아, 이게 되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뿐. 이상하게 이후로는 그 흔한 5등도 당첨되기 어려웠다.

    복권의 효율성 그리고 로또 때문에 꾸는 꿈

    난 ‘희망과 나눔’을 사러 간다
    어느덧 복권은 내 인생에 들어와 있었다. 로또를 사기 위해 일부러 판매점을 찾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꼴로는 산다. 회사 100m 반경에 로또 판매점이 4곳이나 있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간판을 보고 생각이 나면 사는 식이다. 1만 원권 단위로만 팔던 로또를 1000원 단위로도 살 수 있게 된 것도 한 이유가 됐다. 담배 몇 개비 안 피우면 로또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첨 확률이 떨어지면서 언젠가부터 또 다른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당첨 여부를 매주 확인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씩 확인하는 것이다. 로또는 당첨 후 6개월 이내에만 가면 당첨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그 안에 확인하면 상관이 없다.

    이런 습관이 생긴 데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희망’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꿈. 로또 당첨번호를 매주 확인하면 매주 낙담해야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확인하면 낙담의 횟수가 줄고, 반면 꿈꿀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늘어난다.

    실제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모든 시름을 놓아두고 로또 삼매경에 빠져든다. 그러고서 꿈을 꾸면 어김없이 로또 당첨 꿈이다. 꿈속에서만큼은 난 자유인이고 대인배이며 독지가다. 5000원짜리 밥 한 끼를 먹으면 그 순간만 행복하지만 로또는 한 달이 행복해진다. 잰 체하는 사람들이야 천박하다고 욕하겠지만, 나의 잠들기 전 몽상은 늘 ‘1등에 당첨되면 도대체 뭘 하지?’가 주제다. 이미 세워놓은 가설만 수천 개. 하지만 아직 쓰지 않은 시나리오가 더 많다.

    ‘우선 아파트 살 때 진 빚을 갚고 만 14년 된 나의 ‘애마’부터 바꿔봐? 음~, 시승차로 타봤던 제네시스 GH380은 어떨까? 은퇴해서 귀농할 땅을 경기도 광주 근처에 사야지. 그리고 나머지 돈은 금융권에 맡겨서 이자를 받자. 이자의 30%는 절망 속에서 사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데 써야지. 내가 그랬듯, 적어도 돈이 없어 배움을 놓치는 아이가 있어서는 안 되지~.’

    대충 이런 식의 공상이지만 드물게는 ‘민족의 장래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요즘 나는 로또가 나의 신경증 치료제이자 삶의 버팀목 중 하나가 됐음을 절감한다. 내게 로또는 곧 활력소다. 당첨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로또가 지갑 속에 있으면 꿈을 꿀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난 누구들처럼 로또 당첨으로 ‘인생역전’을 바라지 않는다. 하기야 요즘 로또 1등 돼봐야 10억 원 안팎, 강남 중형 아파트 가격도 안 되는데 인생역전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로또를 두고 사행성 운운하는 것도 옛말이 돼버렸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행성 투기는 범람한다. 카지노, 경륜, 경마…. 내겐 오히려 기업의 실적과 따로 노는 주식이 더 사행성이 짙어 보인다.

    난 ‘희망과 나눔’을 사러 간다

    복권기금으로 조성된 대구시 영락재단 옥상의 텃밭. 몸이 불편한 노약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와 농사를 짓는다.

    실제 복권위원회의 설문조사를 보면, ‘복권은 사행성이 있다’는 응답이 2008년 12월 62.6%에서 2009년 12월 50.6%로 크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응답은 다른 사행 업종인 카지노(95.4%), 경마(94.9%) 등과 비교해 현저하게 낮은 것은 물론, ‘주식투자는 사행성이 있다’는 응답 비율(69.7%)보다 낮은 수치다. 다른 한편으로 복권 구매자의 83.6%가 복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68.8%가 복권 구매가 ‘나눔의 한 실천’이라는 데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로또를 사는 3가지 이유

    최근 들어 나는 로또를 사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다. 로또 한 장을 살 때마다 그중 절반 정도가 서민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매주 5000원을 주고 로또를 사면 그중 2500원은 나 같은 서민이나 나보다 힘들게 삶을 꾸려가는 이들에게 쓰인다는 것이다. 벌써 7년째 로또를 사고 있었지만 지난달 고향집 가는 길에 우연히 열차에서 공무원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로또 구매한 돈이 이런 좋은 일에 쓰이는지도 몰랐을 터.

    동대구행 KTX에서 만난 친구는 창밖을 가리키며 “대구선 철로변 인근에 숲이 생겼는데, 그게 로또로 조성된 기금으로 만들어졌다. 결국 네가 산 로또로 만들어진 것이지”라고 말했다. 대구시 공무원인 그는 “로또를 사면 그 액수의 절반 정도가 복권기금으로 조성되고 그중 일부가 도심 숲 조성, 옥상 녹화사업 등을 하는 녹색자금으로 각 지자체나 단체에 환경개선과 관련해 뿌려진다. 4년간 대구시에 지원된 돈만 25억 원을 넘는다”고 전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산 로또가 고향의 숲 조성에, 노약자나 장애인들의 생활공간을 녹지화하는 데 꽤나 많이 이바지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복권기금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복권기금은 그보다 광대한 부분에 쓰이고 있었다. 서민들의 주거안정사업에, 저소득층의 문화증진사업에, 국가유공자의 복지사업에, 재해재난 구호에, 종류가 너무 많아 다 읽어내려 가기도 힘들었다. 내가 사는 로또 한 장이 이토록 많은 곳에 기여하다니….

    나는 요즘 로또를 사면서 1석3조의 효과를 노린다. 희망, 나눔의 기쁨, 경제발전에 기여. 그리고 운이 좋아 대박이 터지면 더 좋고. 만약 내가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 미시경제학 시험을 본다면, 복권의 경제적 효용성에 대해 이렇게 쓸 것이다.

    “경제 주체가 복권을 구입함으로써 조성되는 복권기금은 다양한 사업에 투입돼 각 경제권역에서 고용창출, 소득재분배, 생산유발 효과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경제성장에 순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산되는 ‘희망과 나눔’이라는 무형의 자산은 국민의 생산성 향상에 다시 기여해 또 하나의 투자재 노릇을 톡톡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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