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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의 삶과 수행② |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범일 보성 스님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조급함보다 꾸준한 수행이 중요 … 종단 행자교육원 개설, 교육 기반 다져

  • 유철주 jayu@buddhism.or.kr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왼쪽), 송광사 유나인 현묵 스님(오른쪽)과 나란히 걷고 있는 보성 스님.

송광사 스님들은 철저하게 ‘스님답게’ 산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흐트러짐이 없다. 어떤 전각이든 그 앞을 지날 때면 스님들은 어김없이 합장하고 예를 올린다. 행자부터 방장 스님까지 예외가 없다. 다른 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송광사를 스님사관학교,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부른다. 이렇게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의 중심에 범일 보성(梵日 菩成) 스님이 있다. 1997년부터 조계총림(曹溪叢林) 5대 방장으로 십수 년째 수백의 대중을 이끌고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 스님과 조계총림을 세웠던 구산 스님의 법을 이은 보성 스님은 출가의 인연부터 남달랐다.

“광복 전부터 우리 사회는 좌우이념 대결이 극에 달했습니다. 내 형제와 친구들도 특정 이념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의 이념에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나를 제대로 이끌어줄 것이 없을까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던 중 구산 스님을 만났는데, ‘정신 차려서 스스로를 챙길 수 있는 공부 방법이 불교에 있다’고 하셔서 그길로 구산 스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때가 1944년이었지요.”

당시 해인사 조실(祖室)이 효봉 스님이고, 구산 스님은 원주(院主) 소임을 맡고 있었다.

‘출가’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집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대중이 한집에 모여 같이 머리 깎고, 자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참나’를 찾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지요.”



출가 직후부터 모신 효봉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효봉 스님은 늘 대중과 함께했습니다. 대중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실천했습니다. 대중이 의견을 모을 때도 말씀하기보다 먼저 들으려 하셨고, 항상 화합을 강조하셨지요. 계율(戒律)을 화합의 기본으로 하고, 지독할 만큼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보여주셨습니다.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인지 효봉 스님은 누가 수행에 대해 물으면 철저히 당신의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체험을 법문으로 했던 것이지요.”

한국불교사에서 ‘전설적’ 고승인 효봉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판사를 하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끝에 출가했다.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엉덩이 살이 헐고 진물이 나 좌복(방석)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행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부터 효봉 스님에게는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최근 입적한 법정 스님이 바로 효봉 스님의 직계 제자다.

효봉 스님은 입적하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은 깨어 있다가 생을 마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당신이 잠들면 깨우라고 하셨어요. 아주 곤히 잠드셨다 싶으면 10분 정도 있다가 깨워드렸지요. 스님은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입적하실 때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웬만해서는 눕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제게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스님은 중노릇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보성 스님은 20여 년 모신 노스님(은사의 은사)을 1966년 10월 15일에 보내드렸다.

은사인 구산 스님에 대해서도 불자들이 궁금해합니다.

“구산 스님은 마당 쓸고 풀을 뽑아도 제대로 하라고 하셨지요. 건달처럼 대충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수좌 스님들이 토굴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대중 생활을 해도 공부를 못하는데 혼자 살면서 공부가 되겠느냐고 여러 스님을 혼냈어요. 스님은 염불 10만 시간보다 참선 5분이 낫다며 스님들을 독려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또 게을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송광사 공부가풍은 구산 스님이 다 만들어놓은 것이지요.”

구산 스님도 효봉 스님 못지않은 수행력으로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남원에서 조그만 이발소를 운영하던 스님은 병으로 신음하다 발심(發心)해 지리산 영원사를 찾아가 정진하고 29세에 정식으로 입산 출가했다. 늦게 출가한 만큼 엄청난 수행력으로 용맹정진을 하다 깨달았다. 구산 스님은 1969년 조계총림을 송광사에 개설했으며, 1973년 송광사에 불일(佛日) 국제선원을 열어 해외 포교에도 매진했다.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에 대한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보성 스님의 맏상좌인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은 “방장 스님은 두 어른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배운 것을 후학에게 되도록 많이 전해주시려 한다”며 “어른 스님들에 대한 방장 스님의 존경심은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효봉 스님(앉은 이)과 함께한 젊은 시절의 보성 스님.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부처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중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머릿속에 부처님만 남게 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이뭣고(是甚)를 했지요. 효봉 스님이 주신 것입니다.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납니다. 빨리 무엇을 이루겠다는 마음은 접어두고 꾸준히 공부하면 됩니다. 그러면 지혜가 생깁니다.”

보성 스님을 20여 년간 모셨던 상좌 영진 스님(송광사 도감)은 “방장 스님이 제게 처음 한 말씀이 틈날 때마다 참선하라”였다고 전했다. 율사지만 마음공부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래서 보성 스님이 20안거를 성만(盛滿)한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마음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계율 정립에도 진력한 것이다.

‘목우가풍’이라고 합니다. 조계총림의 가풍은 무엇인가요?

“보조 스님의 호가 목우자(牧牛子)입니다. ‘소를 치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송광사의 가풍이 바로 소를 길들이듯 스스로를 길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코를 꿰어 공부해야 합니다. 누가 공부를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총림대중에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삼일암 미소실(微笑室)에도 목우가풍(牧牛家風)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찾아오는 많은 후학과 신도에게 스님이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도 ‘목우가풍’이다.

보성 스님은 종단의 계율을 관장하는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역임하고, 평소에도 계율을 강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송광사에 총림이 개설되던 1969년 보성 스님은 율주(律主)를 맡아 율원(律院·계율을 가르치는 곳)을 개원했다. 당시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율원은 보성 스님의 관심과 지원으로 율사(律師)를 계속 배출했다. 1988년부터는 ‘비니원(毘尼院)’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데 현재 10여 명의 스님이 공부하고 있다.

“중을 중답게 하는 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출가는 계를 받들어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법난(法難)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중이 출가 본분을 잊고 사는 것이 법난입니다. 계율이라는 그릇이 깨지면 지혜도, 선정도 담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단호했다.

계(戒)를 지키는 불자가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계를 잘 수지할 수 있습니까?

“계율은 본디 착한 마음을 그대로 써나가게 하는 지남(指南)입니다. 선남자, 선여자로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계율을 억압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신을 음해해도 ‘내게 뭔가 허물이 있구나’ 하고 자신을 살핍니다. 행동을 맑게 하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계가 됩니다. 다는 못 지키더라도 ‘이것은 조심해야지’라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행자교육원을 개설하시는 등 승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대만 불광산사에 갔다가 행자교육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확실히 정립된 교육체계가 부러웠습니다. 티베트도 지독하게 공부를 시킵니다. 그렇게 하니 제대로 된 스님이 안 나올 수가 없죠. 스님이 되는 것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한 지도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행자교육이 중요합니다. 1991년 가을에 당시 해인사 교무 무관 스님과 해인사에서 행자교육원을 열었습니다. 23일 동안 전국의 행자를 모아 교육하고, 계를 주는 과정이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송광사 율원장 도일 스님은 “총림 강원과 율원의 교수 스님들이 교재를 구입하거나 관련 책을 구할 때 100% 방장 스님이 비용을 지원해주신다”고 밝혔다. 다른 걱정 말고 학인 스님들 교육에만 진력하라는 뜻이다.

행자교육원 교육과정에 처음 삼보일배를 도입하셨습니다.

“삼보일배(三步一拜)가 공식 의례로 자리 잡은 것은 1992년 행자교육원의 교육과정으로 행해지면서부터입니다. 요즘은 의견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삼보일배를 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인도 친숙한 것 같습니다. 하심(下心)하는 데 땅바닥에 절하는 것만 한 방법이 없습니다. 몸을 땅에 대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행자시절부터 필요합니다.”

국제선원을 처음 개설한 구산 스님의 맏상좌답게 보성 스님은 스님들의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요즘 스님들 왜 이리 영어 공부를 안 하냐?”고 되물을 정도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해외 어디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고려정사’라는 글씨를 쓰고 있는 보성 스님(왼쪽). 보성 스님은 다람살라에서 여러 차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달라이 라마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것이 1991년입니다. 그때 나는 해인사 강주를 비롯한 몇몇 젊은 스님과 함께 다람살라로 갔습니다. 강사들이 많은 경험을 쌓아 후학을 잘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 순례에 나섰지요. 그 후에도 달라이 라마를 여러 번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나라를 잃고 조국에서 쫓겨난 상황에서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탄압한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참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안거(安居)를 마치고 만행을 떠나는 납자(衲子)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지난 결제(結制) 동안 대중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을 것입니다. 깨치는 것이 빠르고 더딘 것은 사람마다 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국 영운선사(靈運禪師)는 30년을 공부해서 깨쳤고, 고봉선사(高峰禪師)는 7일 만에 깨쳤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빨리 깨치겠다는 욕심은 없어야 됩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결제, 해제(解制) 상관없이 간단(間斷) 없는 화두로 끊임없이 공부하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해 눈 녹듯 의심(疑心)이 사라질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스승을 제대로 찾아야 합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녔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스승을 잘 만나야 정견(正見)을 갖출 수 있습니다. 조석(朝夕)으로 부처님께 절하고 기도하면 좋은 스승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돈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스님들은 돈에만 의지해 공부를 잘 안 합니다. 절 주변에 수많은 논밭이 놀고 있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헛되지 않게 살기를 바랍니다.”

사회 전반에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하루에 100명을 죽이면 수행이 완성될 것이라는 바라문의 허언에 빠져 99명의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마저 해치려 할 때, 그의 살기를 내려놓게 한 힘은 ‘멈춰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멈춰라’라고 하신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참성품의 자리에서 쉬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모릅니다. 내려놓을 줄 모릅니다. 쉴 줄 모릅니다. 돈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은 돈 자체를 병으로 만듭니다. 순간순간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마음자리에 서 있는지를 늘 봐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보성 스님은 송광사 내 율원(律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붓글씨를 쓰기 위해서였다. 이번 동안거 때 송광사 선원에서 정진한 한 스님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사찰을 개원하는데, 절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리를 잡고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高麗精舍(고려정사)’. 사실 보성 스님이 붓글씨를 쓴 지는 50년이 넘었다. 그런데 효봉 스님이 “중이 글자만 쓰면 됐지 무슨 붓글씨냐?”고 ‘한 말씀’ 하시는 바람에 한동안 쓰지를 못했다. 그래도 스님의 글씨는 60년이 넘는 당신의 수행기간을 대변하듯 고준하고 간결했다.

보조 지눌 스님과 송광사

학술대회… 평전… 지눌 스님 800주기 다양한 추모사업


“밥은 오래 씹을수록 맛이 좋다”

송광사 전경.

송광사와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서로를 상징한다. 지눌 스님 이후 송광사에서는 16국사(國師)가 배출됐다. 모두 지눌 스님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올해는 보조 지눌 스님이 입적한 지 800주기가 되는 해다. 그래서 송광사는 뿌리나 다름없는 지눌 스님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보성 스님은 지눌 스님 관련 사업을 손수 챙긴다.

“열반 800주기를 맞아 지눌 스님의 면목을 널리 알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조국사 유물 특별전’을 4월 23~30일 서울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고 5월 9~31일에는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진영, 목욕혜(목욕할 때 신는 신발), 능견난사(공양 그릇) 등 109점의 유물을 전시합니다. 특별전 기간 송광사에서는 국사전에 보관 중인 16국사 진영을 대웅보전으로 이운한 뒤, 영산재 등 전통 불교의식을 진행하는 보조국사 종재도 치릅니다. 지눌 스님의 사상을 학술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을경에 ‘보조 지눌의 사상과 현대사회’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엽니다. 11월 발간을 목표로 ‘보조국사 지눌 평전’ 집필도 진행 중입니다. 또 지눌 스님이 남긴 저서들을 한글로 번역한 ‘보조전서’(전 5권)도 곧 출간됩니다.”

보성 스님은 지눌 스님이 한국불교에서 갖는 위상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지눌 스님은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입니다. 치열한 정진 후 1200년 송광사로 대중을 이끌고 와 11년 동안 주석하면서 한국불교를 중흥시켰고 선(禪)의 황금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지금의 간화선 전통은 지눌 스님 이후 정립된 것입니다.”




주간동아 2010.05.04 734호 (p60~63)

유철주 jayu@buddhis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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