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1

2010.04.13

강렬하고 뜨거운 금기된 사랑연가

‘침묵의 시간’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0-04-08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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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하고 뜨거운 금기된 사랑연가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사계절 펴냄/ 159쪽/ 8500원

    독일의 한 고등학교에서 추모식이 진행된다. 참석자 모두가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데 최고 학년인 13학년의 열아홉 살 크리스티안은 홀로 고개를 세우고 영정을 똑바로 바라본다. 영정 속의 얼굴은 이 학교에서 5년째 영어를 가르쳤던 젊은 여교사 슈텔라 페테르젠. 크리스티안은 영정에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슈텔라와의 추억에 빠져 있다.

    ‘내가 어루만진 짧고 검은 머리, 물새섬의 해변에서 입을 맞추고 바라보던 밝은 색 눈. 아,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여름방학에 시작됐다. 휴양도시 히르츠하펜에서 채석꾼인 아버지의 일을 돕느라 여념이 없는 크리스티안에게 초록색 수영복을 입은 슈텔라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바닷가 호텔 앞에서 벌어진 축제에서 춤을 추고, 해변 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옵티미스트 경기에 출전했다가 사고로 위기에 처한 슈텔라의 애제자 게오르크 비잔츠를 함께 구하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해저 돌밭을 구경하러 딩기(요트)를 타고 물새섬으로 향한 날, 돌풍으로 두 사람은 조난을 당했다. 그리고 거친 빗줄기를 피해 들어간 오두막에서 서로의 손길을 처음으로 느꼈다. 아버지의 조수인 프레테리크가 몰고 온 카타리나호에 의해 구출된 두 사람은 슈텔라가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가 한 베개를 베고 누워 커다란 한 개의 자국만 남겼다.

    이후 뜨거운 사이가 지속되면서 슈텔라는 두 사람의 관계를 냉정하게 고민했지만 크리스티안은 더욱 조바심을 내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크리스티안의 머릿속에는 온통 슈텔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슈텔라가 상돛 범선 북극성호를 타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뒤 크리스티안은 하염없이 슈텔라를 기다렸다.

    “기다렸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간혹 기다림의 형벌을 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벌에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선생님의 부재는 여전히 견디기 힘들었다.”

    바다에 돌풍이 부는 가운데 북극성호가 돌아오자 크리스티안은 공포가 이는 것을 느꼈다.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항해로 항구에 닿을 것처럼 보이던 북극성호가 예기치 않은 힘에 밀려 돌밭 저편으로 휩쓸려갔다. 그 사고로 슈텔라는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갔다. 크리스티안은 슈텔라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소망이 점점 격렬하게 일었지만 슈텔라는 병문안을 간 크리스티안에게 눈물 한 번 보여줬을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혼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크리스티안은 병원으로 달려가 텅 빈 병실을 확인하고 슈텔라 아버지에게 소식을 알려주려 그녀의 집으로 갔다. 노인은 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노인은 슈텔라가 크리스티안에게 전해달라고 한 편지를 건넸다. 해양박물관을 선전하는 그 엽서에는 “사랑은, 따스함을 머금은 물결이야”라는 한 문장이 서명과 함께 적혀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슈텔라가 쓴 마지막 문장을 틈나는 대로 반복해서 읽었다.

    “내게는 이것이 마치 나를 향한 고백으로, 약속으로, 그리고 내가 품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던지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느껴졌다.”

    슈텔라의 유골은 바다에 뿌려진다. 크리스티안은 유골과 함께 바다에 던져진 꽃이 자신에게 젊음의 영원한 비극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 꽃들을 건져 둘만의 비밀이 살아 숨 쉬는 오두막으로 옮겨놓기로 마음먹는다.

    “모든 것이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를 거야. 나는 오두막을 별장처럼 꾸밀 생각이야. 해초를 넣은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고, 자면서 당신을 끌어안고….”

    ‘독일어 시간’으로 잘 알려진 지크프리트 렌츠의 ‘침묵의 시간’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 갑자기 찾아온 강렬한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격조 높은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사랑은 사회적 통념으로는 해서는 안 될 금기의 사랑이다. 그러나 금기의 사랑만큼 애절한 사랑이 있을까. 그 사랑으로 크리스티안은 성장통을 해결해나간다. 이런 사랑은 시공간을 달리해도 언제나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에 품을 만큼 열심히 사랑해왔는지 수없이 자문했다. 30여 년 동안 가슴에 품었던 첫사랑,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곁에서 바라만 보아도 행복했던 사랑, 20년간의 결혼생활이 끝난 뒤 우연히 맞이했던 3개월의 짧지만 열정적이었던 사랑. 애절했다. 어느 경우도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열아홉 살의 크리스티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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