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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④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태조의 경처 신덕왕후 정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한 정릉(사적 제208호).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뒤인 1396년 4월 6일, 태조는 광주(廣州)를 지나다 수릉(임금이 생전에 장수를 기원하며 미리 만들어두는 가묘) 자리를 둘러봤다. 조선 개국을 같이 한 경처 신덕왕후 강씨와 영원히 함께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돼 개경의 부인을 경처라 하고, 고향에는 향처를 두었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우물가에서 만났다. 이성계가 장수였을 시절 목이 말라 어느 우물가에 급히 말을 세우고 마침 그곳에서 물을 긷던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 이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떠 그 위에 버드나무 잎을 띄운 뒤 그에게 권했다.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그랬다는 여인의 설명을 듣고 이성계는 탄복해 청혼을 했다.

태조가 수릉을 조영한 지 4개월 뒤인 1396년 8월 9일 병세가 위독한 신덕왕후는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8월 12일 밤 태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3일 후 태조는 백의백관을 대동하고 친히 안암동(오늘날 고려대 부근)으로 나가 능터를 물색했다. 이때 좌우 정승이 신덕왕후를 두고 “현비는 품성이 정숙하고 조행이 근신하며 평시에 늘 경계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는 대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해 내조의 공이 역사에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극찬했다.

8월 20일 태조는 행주에 거동해 능지를 살폈으나 길지(吉地)를 놓고 지관(서운관)끼리 다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노해 이들을 매질하라고 명했다. 이후 태조는 안암동에 능지를 잡고 땅을 파게 했으나 물이 나와 중지했다.

열흘 뒤 태조는 취현방(聚賢坊·현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에 능지를 결정했다. 어렵게 결정한 능의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 능호는 정릉(貞陵)이다. 태조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유택 조영 현장에 수차례 나와 진두지휘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다. 왕후 승하 5개월 뒤인 1397년 1월 3일 신덕왕후를 취현방 북녘 언덕에 묻었다. 장례 후에도 태조는 왕비를 잊지 못해 여러 차례 정릉에 거동하고 능침사찰인 흥천사를 세우고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또한 현비의 외가가 있는 담양군을 담양부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현 정동 영국 대사관 부근에 능 조성

그러나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치르며 왕권을 잡은 이방원(태종)은 1406년 아버지 태조가 공들여 조성한 정릉의 능역이 너무 넓다며 능에서 100보 밖에 집을 짓도록 허용했다. 영의정 하륜이 앞장서 사위들을 거느리고 가 이 땅을 선점했고, 이곳 소나무를 베어 사가의 집을 지었다. 당시 태조는 병이 나서 사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1408년 9월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수릉이 아닌 건원릉에 모시고, 1409년 2월 23일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인 신덕왕후의 정릉에 대해 “옛 도성 안에는 능묘가 없으며 사신이 묵는 관사(태평관)가 가깝다”는 의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으로 옮겼다. 오늘날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 87-16번지로, 현재 국가 지정 사적 제208호다.

조선 최초의 병풍석과 영저, 영탁

2개월 뒤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다 태평관의 누각을 짓고, 돌은 기초석으로 쓰고 봉분의 흔적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遷葬)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다만 문·무석인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명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문·무석인의 조각물은 지금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영국대사관저에 정릉의 유구가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최근 외규장각 도서(왕릉 관련 기록이 많음)의 반환과 더불어 유구의 확인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정릉은 태조가 온갖 정성을 들여 조성한 조선 최초의 조각물인 만큼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10년 8월 8일 큰비가 와서 청계천에서 백성들이 빠져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의정부에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석교(石橋) 광통교가 세워졌다. 최근 청계천을 복원해 조선 최초의 병풍석(屛風石·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는 12방위의 돌)과 영저 영탁(靈杵 靈鐸) 조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리 아래 음지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아니면 태조가 자신의 수릉 조영에 최고의 돌만 골라 쓴 덕분인지 이보다 12년 후에 조영한 건원릉의 조각물과 비교해도 훨씬 잘 보존돼 있고 형상도 선명하다. 이 조각들은 612년이나 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들보다 100년 이상 앞섰다. 청계천을 지날 때 꼭 한번 볼만한 명품이다.

정릉을 성북동으로 옮긴 뒤 봄과 가을에 이품관을 보내 제례를 올렸는데 세종조에는 조정에서 직접 실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족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태종이 정릉을 파묘해 사가 무덤으로 조성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이때 옮긴 사각 장명등과 고석은 조선시대 최초의 석물로 평가된다. 혼유석은 원래의 것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석은 원래 5개였던 것을 2개만 가져다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장한 지 260년 후인 1669년 1월 4일 판부사 송시열은 현종에게 “정릉이 태조 첫 부인의 능인데 태종의 어머니인 제릉(齊陵)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덕왕후를 종묘(태묘)에 배향하고 능도 다른 능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송시열은 동성 간 결혼금지법을 제안했다. 또한 ‘왕자의 난’이 정도전 등의 모함으로 일어났다고 전했다. 이후 송시열계 서인들이 집요하게 상소해 결국 현종은 정릉의 보수를 명하고 재실을 중건하고, 수직수호(능역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사람)를 둘 것을 명했다. 또한 송시열은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며 이는 ‘계지술사(繼志述事)’, 즉 자손이 번성하고 선함을 영원히 전하는 경사라며 선대가 좋게 평가하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후 신덕왕후 강씨는 종묘에 태조의 계비로 추봉됐다.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왼쪽) 조선 최초(1396)의 정릉 석물은 파묘 후 청계천 광통교 축조에 사용됐다. (오른쪽) 석축 병풍석이 뒤집어 사용되고 하단 우측에 영저와 영탁 조각이 보인다.



절선축으로 조성, 뛰어난 자연경관

이처럼 신덕왕후의 복권은 송시열의 작품이었다. 종묘에 추봉되던 날 성북동 정릉 일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고 해 ‘세원지우(洗寃之雨·원통함을 씻어준 비)’라 불렀다고 한다.

정릉의 공간 구성은 일반적 능제가 직선축을 이루는 것에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춰 절선축(折線軸·ㄱ자형으로 굴절하여 꺾어지는 것)으로 조성돼 있다. 능역 입구의 금천교에서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기술을 볼 수 있다. 정릉의 사각 장명등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상부의 주두가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그 규모나 섬세하게 조각한 모습에서 사랑하는 현비를 위해 태조가 공을 들여 조영했음을 엿볼 수 있다.

2009년에 약수터 근처에 방치돼 있던 소전대(망료위라고도 함, 제례를 마치고 지방 등을 소각하는 곳으로 추정)를 찾아 원래의 자리에 상설했다. 600여 년 만의 일이다. 다행히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1788년 정조 때 국조 오례의 연혁과 실행 사례를 자세히 기록한 책)에 그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소전대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원릉, 정릉, 헌릉 세 곳에만 있다.

정릉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능선과 계곡마다 특색 있는 생태경관이 웅장하면서 아담하다. 재실 터 양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 유일하게 능역의 이름을 딴 정릉참나무는 역사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자연경관이다. 정릉참나무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했고 잎은 길이 8~15cm의 긴 타원형으로, 뒷면에 회백색의 성상모가 밀생한다. 만주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정릉 참나무골에서 발견돼 정릉참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 2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희생됐고 유택은 없어졌다. 그러나 앞에서 실록에 전하는 이야기를 추정컨대 정동 근처에 그 흔적과 얘기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토리텔링을 찾는 일도 세계유산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방법이다.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고려 양식을 따른 남한 유일의 정릉 사각 장명등(왼쪽). 최근 발견한 정릉의 소전대(오른쪽).





주간동아 2010.04.13 731호 (p80~82)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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