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3

2009.02.17

‘법복’벗는 양심 … 정의의 촛불 켜나

사직서 낸 박재영 판사

  • 이종식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bell@donga.com

    입력2009-02-10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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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복’벗는 양심 … 정의의 촛불 켜나

    박재영 판사

    2008년 10월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고개를 푹 숙인 성폭행 혐의의 피고인이 법정에 섰다. 미성(美聲)의 판사가 선고에 앞서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죄는 밉지만 피고인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려 합니다. 집행유예로 피고인을 풀어줍니다. 그 대신 법원과 하늘이 베푼 은혜를 기억하세요.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세요.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길 바랍니다.”

    판사는 파렴치범인 피고인에게 “수고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눈시울을 붉힌 피고인은 허리를 90도 굽혀 연거푸 인사했다. 바로 뒤 또 다른 선고가 이어졌다.

    “우리 안진걸 피고인 나오세요.”

    안진걸 씨는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일반교통방해)로 기소된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 선고가 시작되자 판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단호해졌다.



    “피고인의 선고를 연기합니다. 그 대신 피고인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신청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합니다.”

    이 결정으로 집시법은 14년 만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다시 판단받게 됐다. 촛불집회를 옹호하는 듯한 결정을 내려 논란을 일으킨 판사가 바로 최근 사표를 제출한 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박재영(41·사법시험 37회) 씨다.

    박 판사는 법조계에서 ‘친절한 판사’로 통한다. 짜증을 내거나 피고인들의 말을 자르지 않아서다. 흉악범에게도 존칭을 빠뜨리지 않아 ‘피고인 편에 선다’는 오해도 자주 산다. 재판 도중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가 하면 ‘사랑’ ‘우리’ 등 종교적 말투가 입에 배어 ‘종교적 판사’라고도 불린다.

    그는 또 ‘진보적 판사’로도 비친다. 안씨의 재판 중에는 “개인적으로 법복을 입고 있지 않다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이라고 말해 ‘불법시위 두둔 판사’로 찍혔다. 그는 사의를 표명하면서도 “대통령의 생각과 너무 다른 것 같아 더 이상 공직에 있을 수 없다”고 밝혀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그는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돼 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란 뜻이지, 더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이 주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뿐, 확대 해석은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로펌의 변호사로 새 출발을 앞두고 있다. ‘사익’을 대변하고 영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로펌에서도 박 판사의 근본 신념이 변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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