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4

2008.09.30

야생미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인공낙원

꼬마들 기억 속에 곳곳의 테마파크만 자리잡는 것은 아닐까

  •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9-24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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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미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인공낙원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 살얼음이 낀 개천은 달빛을 받아 무슨 시체처럼 차갑게 반짝거리며 아래쪽 미루나무 숲으로 사행(蛇行)의 긴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바로 그 미루나무 숲 언저리로부터 한 사내가 개천 둑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내는 등에 누군가를 업고 있었는데, 외투로 보자기를 씌워서 멀리서 보면 흡사 곱사등 같은 모습이었다. 사내는 그런 모습으로 깊게 눌러쓴 벙거지 속의 눈빛을 세워 사방을 휘둘러보며 천천히 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왔다. 개천의 양켠으로는 추수가 끝난 논밭들이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었는데, 개천의 위쪽에서 복풍이 몰릴 때마다 어디선가 마른 수수깡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내는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개천을 가로지른 신작로의 다리를 넘어서자 사내는 벙거지를 벗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사내는 무심결에 달을 쳐다보았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만월이 구름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기원의 아름답고 슬픈 단편 월행(月行)의 앞부분이다. 제목 그대로 이 짧은 소설에 달이 흐르고 달의 행로를 따라 사람이 밤길을 걸어간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만월’이 속 깊은 사연을 지닌 사내를 비춘다.

    그런데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작품의 원래 뜻과 달리 가만히 소리내어 읽어보면 참으로 아득한 시절의 밤 풍경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는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고 말할 만한 경험이 멸종돼가는 시대다.

    동네에서도 마트 놀이방의 추억뿐

    물론 우리 마음속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자연과 육친성을 맺었던 때에 대한 원형질의 기억이 남아 있기는 하다. 얼마 전에 추석이 있었고, 그런 명절 때문에라도 ‘월행’이 그려주고 있는 세계를 떠올려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마음은 잠시 이 번다한 세속 도시를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향 찾아 내려가는 행렬은 물론이고 도심 한복판에서 밤하늘에 높이 뜬 교교한 만월을 우러러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답 팔아 밤 열차 타고 상경했던 산업화 세대마저 노령이 되고, 차츰 이 세상을 떠나가는 일이 확연해지면서 이제 우리 시대는 자연과의 육친적인 인연을 완전히 상실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40대 부부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상의 한나절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거대한 쇼핑센터에 가서 카트를 밀고 다닌다. 아이들은 카트에 올라타거나 그것도 심심하면 돈 내고 놀 수 있는 놀이방에 들어가서 논다. 바깥으로 나오면 역시 매끈하게 단장된 인공의 호수와 산책로와 나무들 사이를 다닌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아니라 인위로 꾸며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심미적 한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가든’이라는 이름의 큰 음식점에 가는 것이 그날의 마지막 행로인데 여기서도 아이들은 칸막이가 되어 있는 놀이방으로 들어간다. 이 아이들이 커서 어릴 적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모두 ‘마트 놀이방’이나 ‘감자탕집 놀이방’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자연과의 육친성이 단절된다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인공도시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다는 것. 이 거대한 인공의 도시는 계약에 의한 2차적인 인간관계가 주종을 이루게 된다. 어른들이 생계를 위하여 아침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지친 몸을 실어야 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꼬마아이들도 그러한 터전을 상실해 이제는 거대한 쇼핑센터나 음식점 구석에 마련된 ‘놀이방’에 가서야 겨우 뜀뛰기를 해볼 수 있다. 도회적 심미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인 이장욱은 중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중략)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그리하여 우리는 테마파크로 간다. 달이 비추던 세계, 달빛 때문에 제 그림자 길게 논두렁 위로 일렁거리던 세계, 어머니 손잡고 외갓집 가던 고갯마루의 세계, 너른 마당에 솥단지 걸쳐놓던 세계, 집 마당이나 뒤란이나 언덕이나 논두렁이나 가는 곳마다 ‘놀이방’이었던 자연과 육친의 관계를 맺었던 세계. 바로 그 세계와의 단절에 의해 우리는 도시를 벗어나서도 야생의 자연이 아니라 인공의 테마파크를 향해 질주한다.

    야생미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인공낙원

    테마파크는 욕망을 구현하는 인공낙원이다.

    이러다 이 산하 전체가 테마파크로 변할라

    테마파크(theme park)는 특정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걸맞은 오락시설과 건축, 조경 등을 인위로 연출해놓은 공원을 말한다. 놀이동산이나 놀이공원이 다 같은 뜻으로 쓰인다. 최초의 테마파크는 1955년 7월 월트 디즈니가 만든 미국의 디즈니랜드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경우에는 1977년의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이다. 서울 도심에는 롯데월드가 있다.

    이런 테마파크는 인위로서 무위를 구현하려는 욕망의 공간이다. 주차장, 매표소, 입구, 쇼핑가, 놀이시설, 동물원 등이 줄지어 있는 테마파크는 대단히 정교하게 짜인 동선과 공간 구조물을 통하여 ‘자연 혹은 그것을 모사한’ 체험을 즐기도록 해준다. 실제의 자연은 때로 위험하고 불결하다. 더욱이 실제의 자연과 접촉할 기회를 잃어버린 대도시의 일상 때문에 우리는 인위로 자연을 구성한 테마파크에 가서 야생의 동물이나 폭포수, 정글이나 물놀이를 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국 곳곳에 들어선 ‘물놀이 테마파크’는 인공의 백사장과 파도가 매우 안전하고 깨끗한 상태로 제공된다. 그곳에서도 해가 지고 별과 달이 뜨는가. 잠실 롯데월드에 가면, 저녁 시간이 되면,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검은 밤하늘(사실은 천장)에 수많은 별들이(사실은 조명) 반짝거린다.

    각 지역의 유서 깊은 역사나 다채로운 문화가 온통 대단위 테마파크로 재정비되고, ‘대장금’이니 ‘왕건’이니 하는 텔레비전 인기 사극의 촬영 현장 테마공원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세태 역시 자연 대신 인위가 주석을 차지하는 국면을 보여준다.

    물론 그곳의 한나절도 소중한 일상이다. 대중매체가 마음 깊은 곳을 침범해버렸고 마땅히 갈 만한 곳도 점점 줄고 있는 이 한반도의 일상 문화 여건에서 각 고을마다 들어서는 테마파크가 어쩌면 한 시대의 유력한 준거가 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서나 막대기 하나만 있어도 싸움놀이 신나게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길 떠나면 보게 되는 곳곳의 테마파크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침전되는 것을 억지로 막기도 힘든 세월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심뿐만 아니라 이 산하 전체가 테마파크로 변해가는 무지막지한 ‘인공낙원’의 건설 붐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있다. 시인 김선우는 공화국의 모든 길은에서 이렇게 썼다.
    야생미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인공낙원
    저 길이 두렵고 아뜩하다 강릉을 향해 직선으로 내뻗은 고속도로/ 영혼은 직선을 타고 오는 법이 없으니 저 물 아래가 황량하구나. 현자의 목소리가 젖어 있어 나는 꽃 대신 잔기침을 하며 펜 끝에 침을 묻힌다/ 공중을 날 듯 이 길은 동해를 향해 내려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실은, 이 공화국의 모든 길은/ 서울을 향해 놓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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