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8

2008.03.25

“죽음까지 각오했다” … 경마 장외발매소가 “五重殺”

이호성 씨 100억대 부도 후 엄청난 자금 압박 청와대에 탄원서 냈지만 결국 나락으로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8-03-19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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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까지 각오했다” … 경마 장외발매소가 “五重殺”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도는 이호성 씨의 현역 시절 모습.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모델로 한 영화 ‘추격자’가 엄청난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요즘, 그에 못지않게 끔찍한 ‘장면’이 실제 벌어져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2월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서 실종된 모녀 4명이 안타깝게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건 사건 발생의 장본인이 다름 아닌 전 프로야구 스타였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초·중반 무적 구단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의 전성기를 이끈 4번 타자 이호성(41) 씨. 그는 오른손 타자임에도 우중간으로 홈런을 쏘아올릴 수 있을 만큼 타고난 손목 힘을 자랑했다. 그랬던 그가 어이없게도 그 센 힘을 연약한 네 모녀와 자신의 인생까지 마감하는 데 쓰고야 말았다.

    잇따른 사업 실패 범행의 결정적 계기

    도대체 이씨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이번 범행을 저지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경찰 수사를 통해 그의 행적이 속속 공개되면서 범행 동기가 여럿 추정되고 있지만, 결국 사업 실패로 인한 채무에서 비롯된 정신적 부담과 압박감이 계기였던 것으로 가닥이 잡혀간다.

    ‘주간동아’ 취재 결과, 이씨는 프로야구계 은퇴 전인 1999년부터 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친형과 함께 컴퓨터 및 전산장비 도소매 업체인 ‘진성정보시스템’ 법인을 세웠다. 법인 설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인쇄물에서 전산기록지 제조 판매까지 사업을 확대했고, 이듬해는 사업 목적에 건축자재 도소매 업종 등을 추가시켰다.



    그해 전남 화순과 서울 수서에 사무실을 낼 정도로 사업실적은 괜찮았다. 이씨는 2001년 3월 대표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한 달 뒤 복귀했고, 최근 자살 직전까지 그 직위를 유지해왔다.

    2001년 7월부터는 웨딩사업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동업자 한모 씨(현 대표이사)와 함께 ‘호성웨딩문화원’이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자신은 등기이사로 취임했다. 이씨의 친형도 등기이사에 올랐다. 그러고는 광주 북구 매곡동과 목포시 산정동 두 곳에 ‘호성웨딩프라자’를 오픈했고, 그해 10월 기아 타이거즈가 이씨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자 본격적으로 웨딩사업에 집중했다. 미혼인 기아 선수들의 결혼식을 도맡을 정도로 여유도 있었고, 외형상 사업도 잘됐다. 2002년에는 광주시야구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지역방송의 프로야구 해설도 맡는 등 지역사회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2년 3월 호성웨딩문화원 명의로 중소기업은행으로부터 엔화 4억2000만 엔을 차입한 뒤 같은 해 8월 회사 등기이사 명단에서 사라진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채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씨가 물러났거나 대표 측과 불협화음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이씨의 형까지 같은 날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는 점은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어쨌든 이씨의 발목을 잡은 건 전남 순천 화상경마장(마권 장외발매소) 사업이다. 2003년 순천시 덕암동에 상가건물(호성프라자)을 임차해 분양사업에 뛰어든 이씨는 그해 9월 한국마사회 장외발매소 임대 공고에 순천이 임대 대상지역으로 선정되자 사업 방향을 바꿨다. 이씨는 곧바로 한국마사회에 임대 대상 건물 신청을 했고, 건물 실사를 거쳐 12월 임대 예정 건물로 선정됐다.

    “죽음까지 각오했다” … 경마 장외발매소가 “五重殺”

    한때 이호성 씨가 운영했던 ‘호성웨딩문화원’. 아직도 업소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사진 위).<br>경찰이 공개수사 발표를 하고 난 후 서울시내 전봇대에 붙은 이호성 씨의 수배 전단.

    실제 한국마사회의 2004년도 제2차 임시이사회 의사록 제5호에는 창원(D빌), 천안(H빌딩), 의정부(L프라자)와 함께 순천 호성프라자에 대한 장외 개설 사업 선정 승인 신청안을 원안대로 의결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이때부터 이씨는 시설 공사와 전기 설비 등에 돈을 투자했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씨는 2004년 3월26일 농림부에 최종 사업승인 신청을 요청했다. 그러나 농림부가 지역 여론 등에 부딪혀 승인을 유보하자 건물 공사가 중단됐고, 결국 이씨는 100억원대 부도를 맞았다.

    이후 엄청난 자금 압박에 시달린 이씨는 그해 11월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이 탄원서는 이씨가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한 농림부!’라는 제목으로 보낸 서류다. 그는 탄원서에 사업의 진행과 승인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국가기관을 믿고 투자자나 협력업체들의 자본 110억원을 투자해 건물까지 만들어놓았는데 이제 와서 사업승인을 해주지 않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특히 당시 허상만 농림부 장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기자와 통화했던 이씨의 말이다. “순천시도 건물의 용도변경을 허가해줬고(당시 기자가 순천시를 취재했을 때 시 관계자는 용도변경은 법적 요건을 갖춰 해줬으나 장외발매소 시내 입성에는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순천 지체장애인회, 재향군인회 등 16개 단체와 순천시에 입점을 동의한 동의서 2000장을 제출해 호소했는데도 허 장관은 개인 이미지와 소견을 내세워 사업승인에 반대했다.”

    “국가 믿고 사업, 망할 줄 꿈에도 몰랐다”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제출했음에도 결국 승인은 나지 않았고, 한국마사회도 2006년 순천 화상경마장 사업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이씨는 고스란히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씨가 청와대에 탄원서를 낼 무렵, 기자는 그와 전화통화를 한 바 있다(당시 이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011-6XX-0XXX였다. 최근 사건 발생 이후 기자가 그 번호로 통화를 시도해보니 없는 국번이었다). 그는 “현 상황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가타부타 결정을 내려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다 도산이다”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순천의 시민단체 대표를 했던 장관이 싫어한다고 해서… ”라는 말이 수화기 너머로 이어졌다.

    당시 이씨와 나눈 짤막한 대화 내용.

    - 상황이 어려운 것으로 안다.

    “공사 막바지인데 110억원이 들었다. 어음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다.”

    - 공사비 미지급 액수는 어느 정도 되나.

    “60억원 정도 못 주고 있다.”

    - 농림부가 쉽게 뜻을 꺾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농림부 관계자에게 확인해보니 농림부는 산하기관인 한국마사회의 의사결정에는 개입하지 않고 이사회 결정을 승인할지에 대해서만 판단한다고 한다. 장관의 뜻이 부정적이라면 원천적으로 사업승인이 쉽지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마사회가 농림부 산하기관이라는 것이 포인트다. 국가 사업승인 절차가 아무런 조율 없이 이뤄질 수 있는가. (순천)시가 용도변경도 해줬는데, 그렇지 않으면 냉난방 설비에 내가 10억원이나 투자할 이유는 없었다.”

    -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국가 기관을 믿고 사업한 것이 도산의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100여 협력업체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됐다. 협력업체의 피해 확산을 막을 수 있다면 죽음으로도 대신하겠다. 마음 같아서는 장관 퇴진운동이라도 하고 싶다. 아니, 할 것이다. 서울로 가서 담판을 지을 것이다.”

    그것이 이씨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였다. 이듬해 이씨는 공인중개사 등과 함께 충남 연기군 등 신행정수도 관련 부동산 투자금을 유치한 뒤 일부를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면서 더 깊이 나락의 길로 빠졌다. 그러고는 의혹만 남긴 채 비참하게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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