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8

2008.03.25

권력 거부하고 글쓰기에 목숨 걸다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8-03-19 14:3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권력 거부하고 글쓰기에 목숨 걸다

    <b>진인각, 최후의 20년</b><br>육건동 지음/ 박한제·김영종 공역/ 사계절 펴냄/ 819쪽/ 3만9000원

    처음엔 그랬다. 남들이 ‘마흔 이후 30년’류의 자기계발서를 집어들듯 ‘진인각, 최후의 20년’(육건동, 사계절)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다. 나도 이제 갓 오십 줄에 접어들었으니 앞으로 2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책에서 지침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은 820쪽이라는 두께처럼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사람의 유장한 인생이 진하게 녹아 있어 두터운 정신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책을 잡는 순간부터 정신없이 빨려들었다.

    진인각은 누구인가? 20세기 중국의 역사학 종교학 언어학 고증학 문화학과 중국 고전문학 등에서 보기 드문 업적을 거둔 사람이다. 그 가운데 일부 분야의 연구는 개척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기재’로 일컬어진다.

    1890년에 태어난 진인각은 12세인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떠돌이 인생’을 시작한다. 한때 귀국해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을 졸업한 것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베를린대학, 스위스의 취리히대학, 프랑스 파리고등정치학교, 미국 하버드대학 등을 돌아다니며 여러 학문을 습득했다. 이 과정에서 영어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언어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39년에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한학(漢學) 교수로 특별 초빙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배편이 모두 취소되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1937년부터 45년까지 항일전쟁 기간엔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겨우 칭화(淸華)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자리잡은 진인각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섬으로 쫓겨갈 때 비행기까지 내주며 데려가려 했으나 거절한다. 대신 49년에 광주로 가 영남대학의 중문학과 및 역사학과의 교수가 된다.

    그는 55세이던 1945년, 두 눈의 망막이 심하게 손상돼 시력을 잃었다. 게다가 72세 되던 해에는 허벅다리 골절로 걸을 수도 없게 됐다. 이런 육체적 고난과 정치적 격변이 준 상처에도 49년부터 66년까지 17년 동안 학문 연구에 대한 경구나 격언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오로지 책을 쓰면서 ‘당세의 학풍을 바로잡아 남에게 모범이 될 기준’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그는 새로운 논문 17편을 작성했는데 그 분량은 무려 10만 자나 됐다. 또한 53년부터 64년까지 11년 동안 ‘논재생연’ ‘유여시별전’ 등의 저술을 완성했다. 100만 자나 되는 이 글들은 그가 평생 쓴 글의 절반에 해당한다.



    환갑 나이라고 하면 누구나 해질 무렵의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신선하고도 생생한 감수력(感受力)으로 충만해 있었다. 장쾌하고 기세 높은 인생 역정이 막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자신뿐 아니라 중국 문화가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던 시기임에도 그는 환갑 이후 학술적 인생의 제2차 절정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찬란함은 동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학술적 조류의 전면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기에 더욱 진귀했다. 또한 생명이 다시 한 번 폭발해 놀라운 활력을 뿜어냄으로써 ‘문화와 인간’이라는 영원한 주제의 의미를 역사가 다시 한 번 평가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중앙권력은 여러 차례 그를 부르려 했지만 진인각은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자유의지와 독립정신을 유지하는 길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 일은 요즘의 사서와 조교에 해당하는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력자들도 학자적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지만,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이 학자의 눈과 손이 되는 것에 흔쾌히 만족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가늠케 된다.

    진인각은 만년에 자기 운명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초조해했다. 그래서 긴 세월 조력자로 활동한 학자 황훤과 그의 아내 당운으로 하여금 옮겨 쓰게 해 몇 벌의 원고를 마련해뒀다. 그의 예감은 맞아떨어져 홍위병이 마구 날뛰던 문화대혁명이 찾아왔다. 네 가지 낡은 것(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파괴한다는 이 야만적 운동가들은 그를 ‘반동적 학술의 권위자’로 “개똥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결국 그의 가족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으며, 진인각 부부는 1969년 45일의 차이를 두고 운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원고들은 문화대혁명의 수난 속에서도 살아남아 1980년에 이르러 제 빛을 보게 된다. 평생 동안 자신의 긍지를 훼손하거나 곡학아세한 적이 없었던 그의 저술들은 꺼지지 않는 정혼(精魂)이 되어 지금까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역사학자란 어떤 사람일까? 바로 진인각처럼 “언제나 생기를 돌게 하는 맑은 피와 생명을 격앙시키는 독특한 정감으로 일찍이 존재했던 역사를 따뜻하게 데우면서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올해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문을 연 지 10년째 되는 해다. 어떤 전기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는 나에게 진인각의 마지막 20년 인생은 내가 앞으로 평생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시대 학자들의 양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절절하게 일깨워주는 전범으로 이만한 자기계발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