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6

2007.10.16

10·4 선언문 ‘프레임 덩그런 낡은 액자’

남북 현안 백화점식 나열된 합의 … 미시적 차원 실행계획 짜는 데는 실패

  • 권오홍 북한전문가

    입력2007-10-10 19: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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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예상대로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이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공동선언)’은 겉보기에는 꽤 화려하다. 남북간의 온갖 문제가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듯하다. 그러나 한 정권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애당초 ‘실용’을 말했지만, 모호한 선언문만 공허하게 떠올랐다. 자화자찬보다 냉철한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각 조항을 분석해보자.

    1.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 *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해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하여 6월15일을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 2000년 6·15 공동선언이 강조됐다. 이번에 다시 강조된 평화통일의 정신은 6·15 공동선언의 제1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문장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당시에도 ‘우리 민족끼리’라는 수사(修辭)가 강조됐지만, 참여정부 들어서는 6·15 공동선언이 실용적 개념어로 기능하지 못했음에 비춰볼 때, 이 조항은 여전히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주목되는 것은 1991~92년 체결된 ‘남북 기본 합의서와 3개 부속 합의서’의 수준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합의서에는 3개 장(章) 즉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이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이번 ‘2007 남북 정상회담’이 내건 의제의 두 축인 ‘남북관계 발전, 평화번영’과 일치한다. 결국 남과 북은 지난 20여 년간 합의나 선언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였음을 재확인해준 결과물만 하나 더 탄생시킨 셈이다. 나아간 것이 없다.

    2.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문제들을 화해,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 확대와 발전을 위한 문제들을 민족의 염원에 맞게 해결하기 위하여 양측 의회 등 각 분야의 대화와 접촉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 6·15 공동선언과 다른 점은 연합제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등으로 대표되는 통일방안에 대한 협의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상호체제 인정과 존중을 전제로 한 1992 남북화해 부속 합의서 수준을 넘어서지 않은 셈이다. 이 조항 역시 나아간 것이 없다.

    - ‘법률적 제도적 장치’라는 표현에 담긴 함의(含意)는 국가보안법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의 모든 어미(語尾)가 동일한 것처럼, ‘(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말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3.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하여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 간 회담을 금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 서해상의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복잡한 변수가 많은 이슈다.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 방문 이전 여러 차례 직접적, 또는 에둘러 이 문제를 평화수역이나 공동어로수역으로 전환코자 하는 방안을 내비쳤고 이번 회담에서도 이 점을 주장했다고 보이지만, 결국 구체적 합의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 이 점에서는 비무장지대(DMZ)도 예외는 아니다. 남과 북 양측의 경계초소(GP) 해체 등 토의 가능했던 실천 과제에 비하면 선언에 담긴 내용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 ‘서해상 긴장 완화와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향후 후속회담을 열어 구체 논의한다’는 표현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 자체가 여전히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거증(擧證)한 레토릭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장관급회담 또는 국방회담을 통한 후속 추진은 결국 사안의 해결 차원이 아니라 답보 수준임을 의미한다.

    4.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하였다.

    - 북핵문제는 6자회담의 틀에서 국제문제화된 상태다. 북측은 비핵화에 대해 일관된 원칙을 강조하는 레토릭을 사용해왔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으로 한반도 비핵화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지’ 표명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당연한 일에 왜 의지가 필요한가’라는 반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 따라서 6자회담의 2·13 합의를 비롯한 일련의 공동합의들은 지금도 진행 중인 사안이며, 노무현 정부가 주장한 바와 달리 남측이 아닌 미국이 6자회담을 주도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또한 개념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선언’의 수준으로는 ‘논의의 시작’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5.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며, 민족 내부 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을 빠른 시일 안에 완공하고 2단계 개발에 착수하며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 수송을 시작하고,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개보수 문제를 협의,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

    - 가시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이 의제마저도 모호한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현 시점에서 즉각적인 제2 개성공단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던 것임을 재확인한 상태에서, 선언문의 내용 또한 모호해졌다. 개별 사업들이 언급됐지만, 실천의 룰을 가지지 못하고 다시 ‘추진’ 차원에 머물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안변 남포의 조선협력단지 구상은 단일 사업이라는 점에서 나름 신선하다. 농업, 보건의료, 특히 환경보호가 들어간 점도 이채롭다. 그렇다 해도 전반적으로 ‘언어’가 가진 한계치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단일 사업이 아니라 복합적 사업들의 결합체처럼 된 것은 향후 이 사업의 앞날이 험난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 ‘개성공단 3통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조치를 조속히 완비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부분이 그나마 현실적인 주제다. 그러나 이 또한 의지만 담겨 있을 뿐이다. 외교문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노력한다’ ‘조속히’ 등의 단어는 향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표적인 예다. 이것을 성과라고 보기는 좀 어색하다. 당연히 ‘합의된 것이 아니다’. 화물철도 개통 문제에는 북측에서 개성공단에 대한 진일보 개선을 요구한 전제 조건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북측 경제에 대한 기여도를 높여달라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장관급회담, 부총리급으로 격상된 남북경협추진위 등을 통해 해결할 사안이다. 전체적으로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고 그것들이 연장선상에 있음을 양측이 ‘선언’한 셈이다.

    6. 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하여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백두산관광을 실시하며 이를 위하여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2008년 북경 올림픽경기대회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처음으로 이용하여 참가하기로 하였다.

    - 사회 문화 교류는 남북한이 상징적으로 활용하기에 가장 좋은 사례다. 백두산 직항로가 정상회담에서 합의됐으며, 이것을 과연 누가 맡아서 할지에 대한 논의도 있을 터다. 2008 베이징올림픽 때 경의선 열차를 활용하려면 사전에 경의선 자체의 전면적 보수가 필요하다. 단순히 통행 문제로 보기보다 이를 위한 하부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7. 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 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 데 따라 쌍방 대표를 상주시키고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상봉을 상시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 동포애, 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 따라 적극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

    -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주의적 문제임에도 그동안 가장 비인도적으로 다뤄졌다. 이 사안의 문제점은 2000년 이후 여러 차례 명확하게 드러나곤 했다.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남과 북이 정치적 매개로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건립을 통한 상시 상봉이 명기됐다곤 해도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인도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수해 등 자연재해에 대한 명기가 눈에 띄지만, 이는 올해에도 동절기 식량 등의 대북 지원이 필요할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속 지원을 뒷받침한 항목으로 봐야 한다.

    8.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나가기로 하였다. ·#51899;남과 북은 이 선언의 이행을 위하여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기로 하고, 제1차 회의를 금년 11월 중 서울에서 갖기로 하였다. ·#51899;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

    - 국제무대에서 ‘우리 민족끼리’로 표상되는 남과 북의 활동 방향을 정한 대목이다. ‘민족의 이익’이라는 용어가 눈에 띈다. 그를 위한 실행이 관건이다.

    - 합의 이행을 위한 당국간 대화는 당연히 필요하다. 이번 선언을 구체화해야 하는 또 다른 절차다. 6·15 공동선언의 제5항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회담 수준을 총리급으로 격상한 것이 그나마 주목된다.

    - 지금까지 장관급회담 및 위원회 등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에 정상회담이 필요했지만, 문제들이 다시 과거와 비슷한 틀 속으로 들어간 점은 아쉽다. 과연 총리급회담이 누적된 통일부-통일전선부 체제의 미망(迷妄)을 벗어던질 계기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참여정부는 곧 끝난다. 과연 남은 참여정부 기간에 이번 합의선언문의 이행이 어떤 형식과 실질적 성과를 보여줄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정상회담은 결국 정례화에 이르지 못했다. ‘수시’라는 단어는 언뜻 보기에 좋지만 기약 없는 표현이다. 2000년 김정일 위원장의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과연 무엇을 성과라고 부를 것인가? 아마도 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지금 시점에 필요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회담과 선언의 가치를 강조할 것이다. 상대의 ‘평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 점에도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첫째, ‘서울식 관점으로 편하게 발상해온’ 한반도 문제의 현실이 고스란히 까발려졌다. 노 대통령마저 북측 지도층이 개성공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남측 내의 총체적인 정보 전달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상대의 인식 상태를 모르면서 어떻게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둘째, 남과 북 양측이 공동 경제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상호 신뢰’의 틀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간 햇볕과 포용을 정책으로 내놨지만, 신뢰 형성에는 여전히 걸림돌이 많다. 이번 회담은 그것이 일방이 아닌, 쌍방 모두의 책임이라는 점을 드러낸 자리였다.

    셋째, 거시적 경제담론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남과 북이 그동안 주고받은 거시담론은 이번 회담에서도 이렇다 할 ‘실용적 효능’을 보이지 못했다. 이는 달리 말해 미시적 차원의 실행계획을 짜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이고, 이번 회담에서 그것을 담론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준비 부족을 입증한다.

    선언문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면, 마치 ‘프레임(frame)만 덩그러니 있는 낡은 액자’ 같다. 새로운 것, 차별화된 것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러기 위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이뤄지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참여정부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이번 선언의 효능은 차기 정권의 손에 맡겨지게 되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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