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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슬로시티’ 한국 상륙

패스트푸드·백화점·대형할인점 ‘3無’

‘슬로시티’원조 伊 마을 … ‘편리’ 대신 ‘느림’ 택한 후 관광객 늘고 소득 향상

  • 장희정 신라대 국제관광경영학부 교수,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패스트푸드·백화점·대형할인점 ‘3無’

패스트푸드·백화점·대형할인점 ‘3無’

이탈리아 슬로시티 오르비에토 전경.

1999년 10월15일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에 그레베 인 키안티, 브라, 포시타노 등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을 벌이고 있는 네 도시의 시장이 모여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도시, 훌륭한 공공장소와 극장 가게 카페 여관 사적, 그리고 풍광이 훼손되지 않은 도시, 전통 장인의 기술이 살아 있고 현지의 제철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 건강한 음식·건강한 생활·즐거운 삶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추구한다.”(슬로시티 선언)

마을 중심가엔 차량통행 금지, 네온사인도 규제

이 선언 이후 2002년 그레베 인 키안티가 처음으로 슬로시티를 선포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는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인구 1만4000명의 소도시. 해발 500~700m의 산간지방인 이곳은 계단식 경작법으로 포도원과 올리브를 재배하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슬로푸드 운동을 해오던 중 단순히 먹을거리만을 분리해 생각하기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에 맞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시대를 거꾸로 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사투르니니 시장은 먼저 전통이 살아 있는 도시, 청량음료나 인스턴트식품 자판기와 패스트푸드점 같은 빠른 삶을 상징하는 음식이 없는 도시, 대형할인점과 백화점 등 대규모 자본력이 유입되지 않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당연히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일정 구역에서의 주차나 차량 진입 금지, 전통 방식을 강요하는 농축산물 재배·사육 정책은 지역민의 반발을 샀으며, 강렬한 항의소동과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투르니니 시장은 “‘슬로’라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것”임을 강조했으며, 때마침 유럽 전역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외지인의 부동산 거래가 원천 봉쇄되면서 지역 소상공인이 대대로 가업을 이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을 어디에서든 지역민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신선한 식품을 살 수 있게 됐으며, 식당은 인근에서 재배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마을 중앙광장에 깔린 벽돌과 쓰레기통 토기까지도 전통적 방식으로 제작했다. 이에 따라 지역 내 상업적 이익은 고스란히 지역경제로 환원될 수 있었다.

이 마을에는 1000년째 대를 이어 올리브 과수원을 가꿔온 농부, 계단식 경작법을 30년간 실험해 포도농사에 성공한 농부, 그림을 그리는 농부, 시인이면서 30년간 정육점을 운영해온 정육점 주인 등 다양한 명사(celebrity)들이 산다. 정육점 주인은 정육점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모노드라마를 펼치기도 한다. 이런 스타들과 그들이 일궈놓은 마을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그레베 인 키안티는 슬로시티 운동이 확산되면서 지명도가 높아져 관광객 증대, 마을 인구 증가, 소득 수준 향상, 완전 고용, 지역민들의 애향심 고취 등의 효과를 보고 있다.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마을로, 연간 관광객이 200만명이 넘을 만큼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런 도시가 관광객 유치, 첨단화 등의 편리함을 버리고 ‘인간다운 마을’을 추구하겠다며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마을 건물과 도로가 수백 년 전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 그대로이기 때문에 늘어나는 자동차가 큰 위협이 됐다. 이에 따라 시에서는 마을 중심가로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고, 번화가에도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달 수 없게 했다.

패스트푸드·백화점·대형할인점 ‘3無’

그레베 인 키안티의 유명 정육점과 주택을 개조한 고급 호텔(왼쪽부터).

“인구 유입 늘어 지역 고유성 침해” 비판적 시각도

브라에서도 도심지 역사유적지에는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수제품이나 가공식품 등을 다루는 소규모 가족경영 가게들이 최고 입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시청은 도시 미관을 위한 건물 리노베이션을 보조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지역 주민이 재배한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먹는다. 또 지역주민의 과로를 막기 위해 브라의 모든 소규모 음식점들은 목요일과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단, 시청은 시민들이 느긋하게 공공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토요일 아침 근무를 한다.

브라의 부시장 브루나 시빌레는 “우리는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느림의 철학이 도시 행정을 펴는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 오르비에토, 브라 등 슬로시티를 선언한 도시들이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치타슬로(슬로시티) 연맹’은 전 세계적으로 러브콜을 받고 있다. 2007년 현재 슬로시티 선언을 한 도시는 독일 레베스가르텐, 영국 토트네스 등 10개국 93개 도시(지역). 치타슬로한국, 치타슬로영국(cittaslow.org.uk), 치타슬로노르웨이(cittaslow.no), 치타슬로독일(cittaslow.info) 등 여러 나라에서 연맹지부가 생겨나 슬로푸드 못지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슬로시티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경우 유명세를 탄 이후 다른 지역에서의 인구 유입과 관광객 증가가 지역 고유성을 침해하고 각종 공해와 문화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슬로시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물질본능에서 자연·인간본능으로 회귀하고, 너(관광객)와 나(지역주민), 나아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21세기 문화 코드라 할 수 있다. 시빌레 부시장은 “슬로시티 운동이 모든 것을 멈추고 시간을 거꾸로 돌리자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박물관에 박제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멋진 삶을 촉진할 수 있는 현대와 전통의 조화다”라고 말했다.

▼ 슬로시티 국제연맹 가입도시 현황(93개)
국명 도시명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레반토, 토디, 아비아테그라소, 아쿠아라냐,

바르가, 보르고 발 디 타로, 브라, 부치네, 카이아조,

카살벨트라메, 카스텔노보 네 몬티, 카스텔누오보 베라덴가 등
호주
굴라, 카툼바 등
영국
디스, 아일셤, 루드로, 몰드, 퍼스, 토트네스 등
독일
헤스부르크, 파브릭, 레베스가르텐, 발트키르히, 위버링겐 등
노르웨이
레방게르, 손드칼 등
스페인
문기아, 팔스, 팔라프루겔, 베구르, 비가스트로, 레케이티오, 포조알콘 등
폴란드
레스젤, 비스쿠피크, 비스치네크 등
포르투갈
타비라, 라고스, 사오브라, 실베 등
뉴질랜드
마타카나(로드니 디스트릭트) 등
벨기에
실리, 레나, 에딩겐 등




주간동아 603호 (p46~47)

장희정 신라대 국제관광경영학부 교수,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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