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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재, 盧와 코드 다른 ‘盧의 남자’

86년 첫 인연 후 홀로서기·합류 반복 ‘부산의 노무현 대리인’ 별칭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정윤재, 盧와 코드 다른 ‘盧의 남자’

정윤재, 盧와 코드 다른 ‘盧의 남자’


2002년 12월29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명륜동 자택에서 송년회를 겸해 부부동반 측근 회동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인사들에게 “역대 정권의 실정을 절대 되풀이하지 말자”면서 ‘청렴 다짐’을 받아냈다. 이 자리에 참석한 10여 명은 이기명(후원회장), 염동연(정무특보), 이강철(조직특보), 안희정(정무보좌역), 이광재(기획팀장), 서갑원(의전팀장), 여택수(수행비서), 정윤재(부산 사상구 지구당위원장) 등. 한결같이 10년 이상 알고 지낸 최측근들이다.

그러나 취임 전 의지와 달리 이 자리에 참석했던 상당수는 정권 초기부터 갖가지 구설에 오르내렸다. ‘시니어그룹’에 속하는 염동연 씨는 물론 ‘386그룹’을 대표하는 ‘좌희정, 우광재’와 여택수 씨까지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곤욕을 치렀다. 정권 말기에 이른 지금은 노 대통령의 ‘부산그룹’을 대표하는 정윤재(44·사진) 전 대통령 의전비서관이 시험대에 올랐다.

그와 함께 (사)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일했던 한 참여정부 인사는 “안희정과 이광재가 조금 거칠고 활달한 스타일이었다면, 정윤재는 조용한 책상물림처럼 비쳤다”고 회고한다. 정치인 노무현이 만든 최초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노 대통령의 ‘386 삼인방’은 사무국장(안희정), 기획실장(이광재), 연구실장(정윤재)으로 임무를 나눠 ‘주군’의 미래를 대비했다.

나이는 정씨가 두 살 위지만 셋 모두 83학번 동기였기에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노 대통령과의 인연만 20년째인 정씨가 여타 ‘386 성골그룹’과는 판이한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사단’ 내에서 정씨가 차지하는 존재감에 비해 그동안 언론의 주목을 덜 받은 이유는 그와 노 대통령 간의 비교적 느슨한, 때론 팽팽한 긴장관계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 점은 이제까지 반복된 노 대통령과의 만남과 헤어짐에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 의원 당선 후 상경 때도 홀로 노동현장 복귀

부산대 경제학과 83학번인 정씨는 1986년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학내 시위로 구속된 그를 변호한 인물이 바로 노 대통령과 함께 부산지역 시국사건을 전담하던 김광일 변호사(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를 계기로 ‘노변’(386들의 노 대통령 애칭)과 인연을 맺은 정씨는 88년 재야 파견 형식으로 노 후보의 연설담당 비서로 합류한다. 당시 정씨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상태로 부산 사상공단 ‘금형 마찌꼬바(소규모 공장)’에서 밀링 시다 등의 일을 하며 노동조합을 준비 중이었다. 그는 대중연설 경험이 전무했던 노 대통령에게 날달걀과 식초를 전달해가며 발성 연습을 시킴으로써 총선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대부분의 386들이 ‘국회의원 노무현’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는 노동현장으로 복귀했다. 이 같은 ‘거리두기’는 노 대통령의 92년(14대 총선), 95년(부산시장), 2000년(16대 총선) 선거 실패 때도 똑같이 반복된 정씨만의 독특한 행보다. 부산에 남아 ‘부산노동자협의회’교육부장과 전국화물운송노동조합 교육홍보부장 등으로 일하던 정씨는 이후 안양의 정보기술(IT) 업체에 취직해 생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1993년 그는 노 대통령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하자. 너도 이제 학교를 졸업해야 안 되나….”

이후 그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일을 하면서 정식으로 ‘노무현 사단’에 편입된다. 인연에 비해 합류는 늦은 셈이었다. 정씨는 당시 이 연구소에 대해 명패는 거창했지만 살림은 늘 쪼들렸다고 회고했다.

“노 대통령은 어려운 시절 함께 일한 참모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한번은 국회의원 급여에서 사무실 운영비를 원천공제하겠다면서 ‘아빠 나가서 돈 벌어올게’라는 농담을 던져 우리를 웃게 했다. 당시 그는 연구소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한 (…) 일종의 영업맨이었다.”(‘정윤재의 젊은 도전’ 가운데)

1995년 노 대통령의 부산시장 선거를 도운 정씨는 아예 부산에 내려앉아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했다. 96년 15대 총선에서 그는 노 대통령과 함께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사상지역에 출마한다. 당시 33세이던 정씨는 정계 거물인 신상우 씨와 맞붙어 5명의 출마자 가운데 2위라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를 놓고 참여정부 인사들은 “정씨는 참모 역할보다 독립적인 정치인을 꿈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을 선언하자 그는 신한국당에 합류하지 않은 유일한 지구당위원장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이던 노 대통령마저 97년 11월 DJP(김대중-김종필) 진영에 합류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백수’를 자처한 그는 한동안 노 대통령과 소원한 관계를 지속했다.

정당생활을 접은 1996년 이후 그가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입구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다는 일화는 참여정부 내에서 유명하다(당시 서울의 ‘노무현 사단’은 ‘장수천’ 사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97년 찾아온 외환위기로 실패하고 말았다. 정씨 또한 여타 386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 내내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린 셈이다. 그는 대학시절 인연을 맺은 약대 출신 부인 덕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운동권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가난은 절체절명의 숙명이었다고 회고한다.

대선 승리 후에도 부산행 고집 … 17대 총선 실패

정윤재, 盧와 코드 다른 ‘盧의 남자’
한동안 뜸하던 노 대통령과의 관계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완전히 회복됐다. 2000년 노 대통령이 종로구를 포기하고 부산행을 결심하자, 정씨가 자신의 출마를 포기하면서 선거를 도운 것. 이 와중에 노 대통령의 부산행을 가장 반대한 사람 또한 정씨였다는 후문도 있다. 2001년 노무현 캠프가 꾸려지자 부산지역 실무팀장을 맡았고, 2002년 1월에는 민주당 조직책 선정에 참여해 부산시 사상구 지구당위원장을 따냈다. 노 대통령의 부산캠프를 지휘한 그에게는 ‘부산의 노무현 대리인’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대선 승리 후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동료인 이광재 등 다른 386 측근들이 청와대로 들어갈 때 유독 그만이 ‘부산행’을 택했다. 청와대 근무보다 ‘크게 승부하자’는 생각에 또다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던 것. 그러나 2004년 17대 총선에 실패하자 결국 2004년 8월 총리실 민정비서관을 수락, 노 대통령 곁으로 돌아왔다.

참여정부 인사들은 그를 가리켜 “열정보다는 전문성에 더 많은 비중을 뒀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실제로 2001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경제학 석사학위, 2003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에서 ‘한국의 정치엘리트 충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KDI 석사 이후에는 영국 유학을 준비했다가 대통령 선거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다.

2006년 초, 그는 또다시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위해 선거기획단장 자격으로 부산으로 향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국세청간부 및 부산 기업인과의 회동은 부산시장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2006년 8월에 있었다.

참여정부 말기 권력형 청탁사건의 출발점을 찍은 정윤재. 그는 과연 꿈을 잃어버린 또 한 명의 386으로 기록될 것인가. 세인들은 그의 솔직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주간동아 603호 (p18~19)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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