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3

2005.12.06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왕자의 난 직후 이방원 세력에게 70여명 몰살 … 단종 때 ‘설원기’ 통해 명예회복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11-30 15: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경기 평택시 장안동에 있는 연안 차씨 선조들을 모신 의덕사.

    고려가 망하면서 가장 피해를 본 집안은 개성 왕씨들이지만, 이 못지않게 멸문에 이른 집안이 연안(延安) 차씨(車氏)이다.

    “산악과 같은 그 분함은 천 년이 지나간들 가시겠는가? 하해와 같은 그 원한은 만 년이 된들 끝나겠는가?”

    연안 차씨, 차원부(車原)의 죽음을 놓고 박팽년이 훗날 묘사한 글이다.

    차원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재(吉再)는 책상을 끌어내고 등불을 던지며 통곡했고, 조운흘(趙云, 검교정당문학 역임)은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통곡했다. 이방간(李芳幹, 태종 이방원의 형)은 타고 갔던 소를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이양중(李養中, 병조정랑 역임)은 술독을 깨뜨리며 슬퍼했다.

    차원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마중 나온 70여명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몰살됐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곧바로 벼슬을 올려주는 왕의 교지(敎旨)가 그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에게 내려졌는데 안경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다시 교지가 차원부의 아내 평산 신씨에게 내려졌지만 신씨 또한 이를 거절하자, 이번엔 신씨를 죽여버렸다. 손자 차상도(車尙道)는 경상도 순흥으로 몸을 숨겨 고용살이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그 증손자들은 전라도 순천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한순간에 연안 차씨 집안은 멸문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의덕사에는 101인의 차씨 선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중 99인이 고려시대까지의 인물이다.

    차원부는 조선 왕조 창건에 동참하지 않았다.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황해도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岩洞)에 은거하면서, 암반 위에 매화를 심고 연못에 국화를 심으며 지냈다. 그래서 두문동 72현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보다 열다섯 살 연상으로, 이성계가 자문을 청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공신 책봉 거부한 채 평산에 은거

    요동 정벌을 나선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평산으로 찾아가 차원부의 조언을 구했다. 차원부는 이때 “속국이 중국을 범함이 첫 번째 가하지 못함이요, 제후가 천자를 범함이 두 번째 가하지 못함이라”는 사대주의 관점을 제시해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의 명분을 주었다. 하지만 차원부는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고집했다. 조선이 창건된 뒤에 이성계가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려 하자 “비록 다섯 말의 식초를 마실지언정 공신녹권에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조선 후기에 전남 순천에서 판각된 ‘설원기’ 목판본(왼쪽 사진). 운암공 차원부의 묘소에서 옛일을 얘기하고 있는 종친회 사무총장 차기탁 씨.

    1398년 왕자의 난이 나던 해였다. 태조 이성계가 차원부의 흙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서, 석 달 동안 하루에 다섯 번씩 평산으로 칙서(勅書)를 보내 차원부를 불렀다. 차원부는 옛정을 생각해 궁궐에서 보낸 말을 돌려보낸 뒤 평복을 입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궐에 머물면서 왕위 계승 문제로 고뇌하던 태조에게 해답 하나를 제시했다. “시대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하고서 차원부는 궁궐을 떠났다. 궁궐을 떠난 직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차원부는 송원과 마원 땅 부근에 이르렀을 때 살해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있었다고 사가(史家)들은 평하고 있다.

    먼저 태조에게 건넨 차원부의 견해가 와전됐다. 차원부는 정몽주(鄭夢周)의 외종(外從) 형제이고, 이방과(李芳果·정종) 원비(元妃)의 증조부 항렬이니 장차 이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해 명단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차원부가 평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차씨 문중의 족보를 작성했다. 이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판각되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이 족보가 문제였다.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집안의 서얼(庶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빼도 박지도 못할 족보 안에는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하륜의 혼사 비밀도 담겨 있었다.

    설원기에선 차원부 희생 책임 하륜에게 돌려

    고려 신하 고집하다 ‘멸문의 禍’

    차원부 사후에 내려진 교지.

    정도전은 차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는 차운혁(車云革·차원부의 조카)의 이복 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은 차원부의 이복 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의 딸의 아들이었다. 이런 사연을 차원부는 집안 족보에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여기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렸다는 것이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차원부를 궁궐로 불러들인 태조 이성계였다. 그래서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 했고,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記)’를 펴내게 됐다.

    ‘설원기’는 왕명을 받들어 박팽년이 짓고, 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이 주석을 달았으며, 당대에 내로라하는 관료와 선비 48명이 지은 칠언절구 72수의 추모시가 첨부됐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대적인 추모 사업이 진행됐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려는 데만 있지 않았다.

    “골육상쟁을 벌이고 왕좌에 오른 이방원에게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간악한 하륜에게 있다. 서얼 출신인 하륜의 꾐에 넘어가 이방원은 상황을 오판했다. 서얼(하륜)이 감히 적자(차원부)를 넘보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애초에 서자들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서자였던 이방석(李芳碩)이 왕위를 이으려 했던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이복 동생 방석을 죽인 방원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권력을 탐한 하륜 같은 서자들의 교활한 음모가 잘못이다. 차원부는 억울하다”는 논리가 관철된 것이 ‘설원기’다. 고로 차원부의 원한을 풀어줌과 동시에, 태종 이방원의 정당성을 부여한 책이다.



    연안 차씨 집안은 개성 왕씨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더더욱 조선시대 내내 몸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현재 집성촌을 이룬 곳을 보아도 깊은 산골이나 바닷가가 많다. 그리고 하륜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기만 하면 망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근동에 사는 차씨들이 망가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원부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에 있다가 1972년에 평택시 장안동으로 옮겨졌다. 이장을 할 때 보니 시신을 어찌나 깊이 묻었던지, 흙을 두레박으로 퍼내야 할 정도였다. 죽어서도 안심하지 못해 깊이 묻혀야 했던 차원부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선 초기의 권력 지도가 보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