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3

2005.12.06

헉! 개구리가 공주에게 동침 요구

원본은 어른들 위한 작품 잔혹한 묘사 … 전설과 동화 요즘 세상 삭막한 감성 자극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11-30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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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개구리가 공주에게 동침 요구

    ‘라푼젤’

    ‘그림 동화집’은 어떤 언어학적 우연 때문에 어린 시절 내게 큰 실망을 줬던 책이다. 제목은 ‘그림’ 동화집인데 펼쳐보니 그림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그림’이 작가의 이름이란 걸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어쨌든 그 후로 내 머리는 오랫동안 그림 없는 ‘그림 동화집’과 ‘그림 없는 그림책’(안데르센)을 구별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림 동화집’은 창작동화가 아니라 독일의 헤센, 하나우, 마인 등지에서 수집한 전설과 전래동화들을 채록한 구전문학 연구에 가까웠다. “이 동화들을 기록할 바로 그 때가 됐다. 여기에 모아놓은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들은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라고 말하나 책 속의 동화들은 실은 저자들이 자신들의 관념에 맞게 문체적으로 가공한 것이라 한다.

    두 저자 중 형인 야코프는 동화를 고증하는 데 뛰어난 학적 재능을 보였고, 동생 빌헬름은 그렇게 모은 원재료를 섬세하게 다듬어 작품으로 완성하는 탁월한 문학적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림 동화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재능이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그림 동화집’ 역시 원래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원본은 우리가 어린 시절 읽은 것과는 상당히 달라, 가끔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잔혹한 묘사들도 나온다.

    재투성이 소녀

    우리는 ‘개구리 왕자’가 친절한 공주의 사랑스런 키스로 마법에서 풀려난다고 알고 있으나 원작인 ‘개구리 왕 혹은 철의 하인리히’는 그 정황을 사뭇 다르게 묘사한다. 개구리가 공주와 동침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약이 바짝 오른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 벽에다 힘껏 내동댕이쳤습니다. ‘푹 쉬어라, 이 징그러운 개구리야!’ 그런데 방바닥에 떨어진 것은 개구리가 아니라 아름답고 친절한 눈을 가진 왕자였습니다.”



    ‘신데렐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재투성이 소녀’를 보자. 우리는 왕자가 들고 온 게 유리구두라 알고 있으나, 원본에는 황금구두로 나와 있다. 소녀의 의붓언니들이 구두를 신어보는 장면을 원작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런데 그녀의 큼지막한 엄지발가락 때문에 신발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딸에게 칼을 주며 말했습니다.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려라. 왕비가 되면 걸어다닐 필요가 없을 테니까.’”

    ‘향나무’라는 동화에는 심지어 카니발리즘의 장면까지 등장한다. “탕, 상자 뚜껑이 닫혔고 소년의 목이 사과 상자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엄마는 소년을 가져다가 토막을 내어 솥에다 넣고 수프를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소년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수프를 맛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좀더 주구려. 다른 사람은 손대면 안 돼. 모두 내가 먹어야 할 것 같아.”

    헉! 개구리가 공주에게 동침 요구

    ‘백설공주’

    ‘털북숭이 공주’에는 아버지가 딸을 아내로 취하는 근친상간의 장면도 나온다. 구전이라는 것이 아직 기독교 윤리에 물들지 않은 아득한 고대의 기억을 담은 것이기에 당대의 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동화집’ 속에 적절히 완화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일례로 자식을 해치는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닌 의붓어머니로 고쳐 썼다고 한다. ‘심술궂은 계모’의 이미지는 이 과정에서 탄생한 모양이다.

    민중의 시

    그림 형제는 왜 전설과 동화를 수집하려 했을까? 거기에는 당시에 독일을 풍미하던 낭만주의의 영향이 컸다. 낭만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 예술은 교육받지 않은 부족들의 소박한 ‘민중시’에서 비롯됐다고 믿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위적 꾸밈이 없는 민중들의 ‘자연시’가 그 후에 발생한 모든 예술의 원형이라 보았다. 이성주의에 맞서려 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비합리적 스토리로 가득 찬 전설과 동화는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 민중동화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으로만 알고 있던 근원적인 독일 신화가 들어 있다.” 비록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림 형제의 작업에 이런 낭만적 관념이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래동화가 온전히 민중의 것이라는 믿음은 그림 형제의 이상화한 관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에게 동화를 들려준 이들은 민중이 아니라 주로 중상층에 속하는 교육받은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족적인 것에 대한 그림 형제의 열망에도, 동화집 속에 수록된 얘기들은 순수 ‘독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얘기를 들려준 마리 하센플룩과 도로테아 피만, 이 두 여성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파(派)의 가정에 속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장화 신은 고양이’인데 이 이야기는 샤를 페로가 지은 ‘고양이 영주, 혹은 고양이 보테’와 너무 비슷하여 후에 동화집에서 빠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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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바덴 숲 속의 전설’

    마르바덴 숲의 전설

    ‘그림 동화집’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전에 본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 ‘그림 형제-마르바덴 숲 속의 전설’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림 형제의 전기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두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여 쓴 또 하나의 동화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그림 형제는 일종의 ‘고스트 버스터’로, 즉 교묘한 트릭으로 귀신을 쫓아준다며 아직 미신을 믿는 민중들을 등치는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물론 실제의 그림 형제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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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젤과 그레텔’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여러 동화 속의 요소들을 취해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를 빚어낸다. 예를 들어 입구가 없는 높은 탑 속에 갇혀 사는 왕비는 ‘라푼젤’을, 아이들이 숲 속에서 사라지는 장면은 ‘빨간 모자’와 ‘헨젤과 그레텔’을, 나무가 인간을 삼키는 장면은 ‘향나무’를, 마법 숲에서 개구리에게 길을 묻는 장면은 ‘개구리왕’을, 그리고 소녀가 키스를 받고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백설공주’를 각각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시대상황의 묘사다. 영화 속의 독일은 나폴레옹군에게 점령을 당한 상태. 여기서 그림 형제는 프랑스와 이중으로 대립한다. 그들은 점령군인 프랑스에 대해 ‘민족적 반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나폴레옹 군대가 대변하던 이성의 빛에 대항하여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 다시 말하면 논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비합리적인 것’이 존재할 권리를 주장한다.

    프랑스적인 것과 독일적인 것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폴레옹 군대는 독일의 지성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침략자가 아니라 해방군이었다. 가령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교향곡 ‘영웅’을 써 바쳤고 철학자 헤겔은 말 위에 탄 나폴레옹을 향해 “보라, 저기 절대정신이 지나가고 있다”고 외쳤다. 그것은 아직 전근대성을 벗지 못한 독일과 같은 후진국에서 나폴레옹은 빛과 이성, 한마디로 근대성의 표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영화 속에 묘사된 독일 민중은 여전히 유령의 존재와 마법의 힘을 믿는다. 반면 점령군인 프랑스군의 장군은 끝까지 미신이나 마법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마르바덴의 숲이 마법에 걸려 있고 나무들이 뚜벅뚜벅 걸어 자신에게 다가올 때조차도 그는 이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성을 믿지 않고 끝까지 이를 그림 형제가 행하는 트릭으로만 간주한다. 프랑스의 정신은 이렇게 철저하게 합리적이다.

    영화에서 그림 형제는 각각 다른 성격을 대변한다. 형인 야코프는 법학을 전공한 언어학자답게 매우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문학적 재능을 지닌 동생은 동화의 세계에 집착한다. 하지만 이런 성격 차이에도, 끝까지 마법의 존재를 믿지 않는 프랑스 장군과 달리 결국은 둘 다 마르바덴의 숲의 마법을 인정한다. 그 점에서 프랑스 고전주의와는 다른 독일 낭만주의의 분위기를 상징한다.

    이성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이 영화 시나리오에서 어떤 문화사적 명제를 읽을 수 있다. 영화는 어느 방앗간에 억울하게 마녀로 몰려 처형당한 여인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계는 아직 마법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다. 마법에 대항하는 방법은 역시 마법밖에 없다. 그림 형제는 주술의 힘을 빌려 유령을 몰아낸다. 이곳은 아직 계몽 이전의 시대, 이성 이전의 세계다.

    헉! 개구리가 공주에게 동침 요구

    ‘개구리왕’

    하지만 잠시 후 그림 형제가 물리친 유령은 그들이 고용한 일꾼들로 드러난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는 마을에 찾아가, 일꾼들을 귀신으로 분장시켜 나타나게 한 뒤 이를 물리쳤다고 하여 수고료를 챙겨왔던 것이다. 이로써 방앗간에 귀신이 나타나는 비합리적 현상은 이성적으로 해명이 된다. 사기꾼 그림 형제는 “어쨌든 자신들이 민중들을 미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변명한다.

    이런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프랑스군에 체포된 그림 형제는 마르바덴 숲에서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프랑스군 장군의 이성적 머리는 숲이 아이들을 집어삼킨다는 것은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그림 형제와 비슷한 부류의 사기꾼들이 저지르는 유괴사건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여기서 점령군의 장군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 즉 계몽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동화의 귀환

    실제로 과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형 야코프도 숲의 마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사기꾼들이 아이들을 유괴하는 데에 어떤 트릭을 사용했는지 합리적으로 조사하려 한다. 하지만 그 역시 점차 정말로 숲에 마법이 걸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구텐베르크 은하, 즉 문자문화의 정점인 계몽주의는 실패한다. 이는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환상적인 것이 귀환하고 있는 최근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듯하다.

    프랑스군 장군은 동생 빌헬름이 기록하고 있던 동화책을 불속에 집어던진다. 이성의 시대에 동화는 이성적인 어른의 세계에서 추방당해 어리석은 아이들의 것이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빌헬름은 불속에서 타지 않고 살아남은 동화책을 되찾는다. 환상은 이렇게 귀환했다. 어린 시절 읽고 불속에 던져버렸던 ‘그림 동화집’, 어른이 되어서 다시 꺼내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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