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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기자의 차이나 프리즘

사후 16년 만에 명예회복하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

  • heb8610@donga.com

사후 16년 만에 명예회복하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

올해 11월20일은 중국 현대사에 매우 의미 있는 날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이날 베이징인민대회당에서 엄숙하게 거행될 한 정치행사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해외 관측통들의 주목을 끈 문제의 정치행사는 후야오방(胡耀邦) 탄신 90주년 기념식.

후야오방은 1980년부터 87년까지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로 재직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초창기를 열어간 인물. 그는 당시 실권자인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개방을 지지한 것은 물론 정치, 문화, 교육 등 전면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이런 그의 개혁노선은 당내 보수파로부터 자산계급 자유화의 오류를 범했다는 공격을 받고, 결국 87년 실각하게 됐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이 베이징에서 병사하자 그의 추모집회를 계기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폭발, 중국 현대사의 비극인 6·4 톈안먼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국가 지도자들의 100주년 탄신일을 기념해오고 있다.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지도자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에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벌어지곤 했다. 이런 전통과 달리 예외적으로 후야오방의 90회 탄신기념식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 주석이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회의에서 후야오방 기념행사를 제안하자 “후야오방을 기념하면 6·4 톈안먼 사태는 어떻게 하나”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는 어떡하나”는 등의 반론이 나왔지만 후 주석이 강력히 설득해 전원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후문이다.

후 주석이 후야오방의 명예회복에 발 벗고 나선 데는 두 사람 간의 특수한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81년으로 후야오방의 아들이 다리를 놓았다. 그해 9월부터 중앙당교 청년간부반 학습과정에 입소해 교육을 받던 후진타오는 같은 교육을 받으러 온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 중국역사박물관 부관장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 후 총서기 자택을 방문한 후진타오는 처음 후야오방과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키워주고, 존경하는’ 각별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따후(大胡·후야오방)가 샤오후(小胡·후진타오)의 정치적 사부가 된 것.



이 같은 개인적 인연 말고도 후진타오 주석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있다. 후 주석은 최근 과학 발전을 통해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고 역설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후야오방의 정치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후 주석으로서는 후야오방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정치행사를 통해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유산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쳐나갈 계기로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렇다면 사후 16년 만에 이루어지는 후야오방의 명예회복이 중국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선 후 주석 취임 후 기대에 비해 미흡한 것으로 평가돼온 중국의 민주화 진전에 새로운 기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후야오방에 대한 명예회복은 자연히 6·4 톈안먼 사태 재평가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당시 학생들의 요구에 이해를 표시했다가 실각했던 자오쯔양 전 총서기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와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한편 후야오방 탄신기념 행사가 발표되자 중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는 파룬궁 측은 “기공 수련을 최초로 인정했고 민주개혁을 주장했다가 실각한 지도자 후야오방의 복권이 후진타오 개인의 사적 인정의 발로가 아니라 민주 중국을 꿈꾸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순수한 인권회복의 발로라고 한다면 후진타오의 훌륭한 선택으로 높이 평가될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주간동아 2005.11.29 512호 (p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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