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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도청과 관음 사이의 줄타기

  • 하지현 용인정신병원 정신과 전문의

도청과 관음 사이의 줄타기

도청과 관음 사이의 줄타기
세칭 ‘미림팀’이 만든 도청 테이프의 존재가 폭로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다. 처음엔 기업과 언론사의 정치 로비 폭로 수준이었다. 그런데 도청 테이프가 총 몇 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도청의 대상이 폭넓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파장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실 난 정치권 일각에서 잇속 챙기기 위한 그들만의 얘기겠지 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에서 휴대전화, e메일, 메신저도 충분히 도청하고 또 이미 많은 기업에서 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이제 도청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게 되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도청 공화국이다.

내가 생각한 것, 몰래 말한 것들을 누군가가 알고 있거나 듣고 있다는 가정 속에 살아야 한다면 어떤 상태가 될까? 아이들은 부모에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아이가 부모를 정말 속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비밀을 만들고, 그걸 통해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세우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결과로 본다. 거짓말에 부모가 속아 넘어가는 경험을 하면 아이들은 그 순간 부모로부터 잠시나마 독립된 개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의 자아가 발달하는 것은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하여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내가 세운 자아의 경계선 안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내 생각을 알거나, 또 내가 하는 말들을 엿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자기가 세워놓은 가상의 경계선이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남의 생각인지 헷갈린다. 심한 경우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고, 나와 얘기하는 사람은 내 마음을 훤히 읽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를 ‘관계 사고’라 하는데 정신분열병 핵심 증상의 하나다. 오래전 뉴스 생방송 중 ‘내 귀에 도청장치가 달려 있다”고 소리쳤던 한 정신질환자를 기억하는가. 그는 바로 그런 관계 사고 속에 있기에 자기가 항상 도·감청을 당하고 있다고 여겼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는 물론 극단적 증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이런 상시적 도청에 대한 의혹이 만연할 때 이런 심리는 충분히 일반화될 수 있다. 구성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더 나아가 타인과 집단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떨어뜨린다. 그만큼 도청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은 도청의 내용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 전체를 심리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도청의 존재를 안 사람들이 그 내용을 철저히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에게만 그 내용을 알려주겠소’라고 한다면 그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검찰총장이 자기에게는 도청 테이프의 구체적 내용을 보고하지 말라고 했겠는가. 사회가 그 내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도청 내용이 모두 발표된다면 잠시는 통쾌하고 시원한 기분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이 가져올 파장을 감내할 능력이 없다면 그 내용물은 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의 폭만 깊게 하고, 나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상시적 불안감만 높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알고 싶은 이유는 관음증적인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관음은 그만큼의 책임을 요구한다. ‘피핑 톰’(사생활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의 비극이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뭔가 비밀을 떠안았을 때 그것은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한번 맛들인 관음의 맛은 떨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도청의 공포와 관음의 유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자아의 경계를 흔들 위험이 있고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다는 것, 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간동아 2005.08.16 498호 (p100~100)

하지현 용인정신병원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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