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8

2005.03.29

지관을 3代하면 絶孫 … 자연의 응징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5-03-24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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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관을 3代하면 絶孫 … 자연의 응징

    벌고개임을 알려주는 봉현(蜂峴) 표석.반남 박씨 시조 묘.(위부터)

    전남 나주시 왕곡면과 공산면을 잇는 23번 국도 중간 지점에서 반남면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작은 지방도로가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반남 고분군(古墳群)’ 표지와 함께 거대한 무덤들을 볼 수 있고, 다시 몇 백 미터를 가다 보면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이 ‘벌고개(蜂峴)’인데 고갯마루 한쪽에 ‘蜂峴’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봉현’ 표석은 어느 이름 모를 지관을 위해 반남 박씨 문중에서 세워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때는 고려 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반남면 일대의 호족이었던 박응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의가 인근 지관에게 묏자리 소점(터 잡는 일)을 부탁했다. 지관이 묏자리를 잡아주긴 했는데 어쩐지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지관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의는 한밤중에 지관의 집에 몰래 들어가 지관 부부의 대화를 엿듣는다.

    “박 호장님(박응주) 댁 묏자리를 잡아주셨어요?”

    “잡아주기는 했는데, 사실 그 자리보다는 큰 버드나무 아래가 더 좋아.”



    “그러면 왜 그 자리로 잡아주지 않았어요?”

    “그 자리로 잡으면 내게 큰 화가 닥쳐서….”

    이 말을 들은 박의는 다음날 지관이 말한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지관이 새파랗게 질려 빌면서 말했다.

    “제발 제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묏자리 파는 것을 늦춰주십시오.”

    지관의 부탁을 듣고 잠시 기다렸던 의는 지관이 자기 집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될 즈음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땅속에서 큰 벌들이 나와 고개 쪽으로 날아갔다. 벌들은 고갯마루를 넘어가던 지관을 쏘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박응주의 무덤을 ‘벌명당’, 지관이 숨진 고개를 ‘벌고개’라고 불렀고 그 자리에 ‘蜂峴’이라 새긴 표석을 세워놓았다.

    이후 반남 박씨는 벌명당의 발복 덕분에 후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높은 벼슬은 말할 것도 없고 큰 학자도 부지기수로 배출했다. 박세채, 박세당, 박지원 등 교과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학자들뿐 아니라 대한제국 정치인 박규수에서 최근 철학계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찬국(서울대 철학과) 교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벌명당의 후손들이다.

    물론 벌명당의 전설은 반남 박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사당동 동래 정씨, 전북 완주 산정마을 진주 소씨 선영도 이와 비슷한 벌명당 전설을 가지고 있다.

    ‘벌명당’이란 뒷산(주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멍덕(재래식 벌통 위를 덮는 뚜껑. 짚으로 틀어서 바가지 형태로 만듦) 모양이면서 주변 형세가 꽃의 이미지를 띤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 무덤을 쓰면 벌떼처럼 자손이 번창하고, 또 그 벌떼들이 부지런히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엄청나게 쌓이는 소응(昭應·감응이 또렷이 드러남)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현대 생태사상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벌명당을 잡아준 지관의 죽음이다. 반남 박씨뿐만 아니라 진주 소씨, 동래 정씨를 위해 벌명당을 소점해준 지관은 모두 벌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만물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집이 있다. 인간만 좋은 집터를 가지란 법은 없다. 동식물도 각기 천혜의 명당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관이 그러한 동식물의 집터를 빼앗아 인간이 차지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생태계 파괴자’가 된 셈이다. 집을 빼앗긴 벌들이 ‘생태계의 파괴자’를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이 벌명당 전설에 깃든 교훈이다.

    조선조 최고 풍수사들 사이에 ‘지관(풍수)을 3대 하면 절손(絶孫)한다’는 말이 있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고 여겨진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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