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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 l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17세기 말 ‘유라시아 르네상스’ 주창 … 중국의 괘상도·실천철학 등 우수성에 ‘감탄’

  •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라이프니츠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 키르허의 저서 ‘중국도설(China Illustrata)’에 실린 삽화들. 만주족 황제(왼쪽)와 중국 황실에 서구 천문학의 우월성을 알린 예수회 신부 요한 아담 샬이다.

우리는 멀쩡히 살고 있는데 멀리서 배 한 척이 와서 깔짝거리다 돌아가서는 ‘동양을 발견했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1994년 5월 유럽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대륙은 실재했다. 지구 반대편에도 이성이 존재하다니. 게다가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내가 서양에 가서 느꼈던 감정을 서양인들은 수백년 전에 동양에서 느꼈던 모양이다.

영국의 조지 3세(1738~1820)가 중국에 대등한 국교를 청해왔을 때 청의 건륭제(乾隆帝)는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감히 섬나라 오랑캐가 중국과 맞먹으려 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천조(天朝)의 덕이 사해(四海)에 퍼져 세계의 수많은 나라가 조공을 바치므로 중국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따라서 영국과의 교역은 필요 없다.”

짝사랑에서 경멸로

19세기만 해도 영국은 거대한 중국에 내다 팔 물건이 없었다. 약간의 모직과 향료를 팔아 그 비싼 차와 비단, 도자기 대금을 댈 수는 없는 일. 결제 수단이던 은(銀)의 유출로 고민하던 영국이 팔 것은 딱 하나, 아편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의 생산력이 중국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시아가 낙후되었다는 생각은 언제 생겼을까?

서구가 타 문화에 접근하는 일반적 공식은 선교사를 보내 정탐하고, 상선을 보내 판을 깔고, 군대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선교사를 보내던 시절에 서구는 중국에 열등의식을 느꼈다. 중국을 폄하하는 서구인의 태도는 상선을 보낼 즈음에 형성되었다.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는 장사꾼들에게 중국은 시장을 규제하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 이 불평이 군대가 들어갈 때쯤에는 이미 중국에 대한 경멸로 바뀌어 있었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라이프니츠가 쓴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유라시아 르네상스의 꿈

하지만 중국 땅을 처음 밟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은 경이 그 자체였다. 이들의 보고서 덕에 유럽에 수많은 중국 예찬자가 생기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도 거기에 끼여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서구의 수공업 기술은 중국과 동등하고, 사변적 학문은 중국보다 낫고, 실천철학은 중국이 서구를 능가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수한지 종합적 판단을 내린다면 ‘중국인에게 황금사과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프니츠는 중간의 러시아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유라시아 르네상스를 꿈꿨다. 이를 위해 유럽의 학자와 중국의 학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세계 아카데미’의 설립을 주장했다. “가장 문명화되었지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들이 서로 팔을 뻗침으로써 두 대륙 사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합리적 생활방식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중국도설’에 실린 한자의 발생에 관한 삽화.

중국과 노아의 방주

서구의 전유물로 알았던 ‘이성’이 대륙의 다른 끝에도 존재했다. 이는 모든 사유, 모든 언어, 모든 민족이 공통의 근원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모든 사유와 언어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면, 원형이 되는 사고를 표현할 ‘보편문자’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통일해줄 보편문자의 힌트를 라이프니츠는 상형문자인 한자에서 찾으려 했다.

서구와 중국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학문적 손자뻘인 독일의 비평가 고트셰트(1700~66)에 이르러 황당한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노아가 중국인들의 최초의 군주이자 조상이라는 사실만큼 개연적인 것은 없다.”

한마디로 중국문명의 아버지 황제(黃帝)가 대홍수의 노아라는 것이다. 하긴 라이프니츠보다 한 세대 앞의 천문학자 케플러(1571~1630)는 중국의 요임금이 노아의 손자라고 주장했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청나라 강희제의 초상.

괘상도와 이진법

1697년 라이프니츠는 후원자 루돌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새로운 계산법을 발견한 사실을 알린다. 오늘날 컴퓨터 공학의 토대가 된 ‘이진법’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발견을 기리는 메달을 만들어 대공에게 보냈는데, 대공의 초상을 새긴 메달의 뒷면에는 이진수 표와 함께 이런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무(0)에서 만물이 창조되는 데에는 하나(1)로 충분하다.”

그는 이를 ‘창조의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게 ‘무로부터 창조’라는 기독교적 관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공허한 심연과 황량한 어두움은 무(0)에 속하는 반면, 하나님의 신은 그 빛과 함께 전능한 하나(1)에 속하므로 이 메달은 창조를 묘사하는 데에 더욱더 적절합니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이 신의 비밀을 이용하여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부베 신부가 베이징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괘상도.

1701년 라이프니츠는 베이징의 부베 신부에게서 전설적 황제 복희(伏羲)가 만들었다는 괘상도(卦象圖)를 받고 경악한다. ‘독일 민족에게 적지 않은 명성을 가져다줄’ 이 산법이 중국에 이미 수천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완전한 선을 1, 끊어진 선을 0으로 보면 괘상도는 이진법으로 표기된 숫자를 의미한다. 가령 태극기의 건곤감리(乾坤坎離)의 예를 들어보자.

≡ =1+2¹+2²=7

=1+0+2²=5

=0+2¹+0=2

=0+0+0=0

중국인도 기독교적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선교를 하는 데 중국의 고전을 이용하곤 했다. 중국 경전에 나오는 상제(上帝)가 실은 서양의 천주라는 식이다. 이렇게 기독교와 중국의 자연철학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이는 후에 롱고바르디나 생트 마리와 같은 선교사들의 비판을 받는다. 기독교 교리를 중국의 미신과 뒤섞어놓고, 기독교 의식을 중국의 제사와 뒤섞어놓았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마테오 리치를 옹호한다. 중국인들도 과거에는 신을 알았으나 후에 그것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보유론은 자신의 고대를 잊어버림으로써 기독교적 진리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을 교화하는 기술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理)’의 개념이 기독교 신의 관념과 거의 일치한다면서 중국의 자연철학을 범신론 혹은 무신론이 아니라 감추어진 유신론으로 해석했다.

인간 귀족들

당시는 강희제(康熙帝, 1654~1722)의 시대. ‘법을 존중하고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는’ 이 고귀한 황제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哲人)군주의 전형이었다. 황제는 서예에 능하고 중국의 학문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1623~88)에게서 배워 유클리드와 삼각함수를 이해하고 산술로 천체 현상을 증명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은 높아 태양왕 루이 14세가 부러워할 정도였다.

라이프니츠의 눈에는 황제만이 아니라 백성들 역시 인간 귀족으로 보였다. 중국인들은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고 ‘부모에 대한 배려는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농부나 하인들조차 예의를 지키며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유럽 귀족의 고상함에 버금간다’. 농부와 하인이 이 정도니 ‘중국의 관료와 각료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하지 않겠는가?’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계산기

산법이냐 점괘냐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한계 또한 알고 있었다. 가령 이진법을 구현한 복희의 팔괘를 중국인들은 주로 점을 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예수회 신부 아담 샬(1591~ 1666)은 일식을 예언함으로써 서구의 천문학이 중국의 것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괴상한 종교를 가진 서양 오랑캐가 그나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중국의 결정적 한계는 수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 마침 서구에서는 라이프니츠 자신이 미적분을 발명함으로써 자연의 수학화를 완성하던 참이었다. 또 한 가지 중국이 뒤떨어진 것은 전쟁기술. 하지만 이는 중국인들이 전쟁기술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공격성을 생기게 하는 것을 경멸하며, 의식적으로 전쟁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화와 오랑캐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중국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글을 모은 이 책은 서구와 중국의 첫 만남의 생생한 기록이다. 라이프니츠는 두 문화가 전 인류를 위해 대등한 관계 위에서 서로 협력하기를 꿈꿨다. 서양만 선교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동양도 서양에 승려를 보내 자기들이 앞선 부분을 서구에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중국에 진출한 가톨릭 수도회 가운데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와 달리 중국인들의 제사를 금지했다. 이 경직된 태도 때문에 중국에서 포교활동이 금지되고, 선교사를 통한 두 문화의 대화도 단절된다.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擁正帝, 1678~1735)는 서구의 오만함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만약 내가 당신들이 사는 유럽 어떤 지방에 승려를 보낸다면 당신들의 왕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작 폐쇄적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보여준 개방성 역시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한 게 아니라, 귀찮게 덤벼드는 오랑캐에게 베푸는 ‘천조(天朝)의 덕’일 뿐이었다. 중국은 오랑캐에게 바라는 게 없었고 배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오랑캐의 군사력에 무릎을 꿇고 만다. 전쟁기술을 소홀히 하는 중국인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과 중국의 하나 됨을 꿈꾸다

라이프니츠 초상화.

“그들만이 홀로 지구에 산다면, 사실 그들의 행위는 현명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는 더 이상 중국이 지구에 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중화와 소중화

한국은 과거에 ‘소중화’를 자처했다. 그래선지 중국인들이 서양 오랑캐를 대하는 태도와 한국이 일본 오랑캐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 닮았다. 서양은 중국이 필요했으나, 중국에 서양은 성가신 존재였다. 일본은 조선이 필요했으나, 조선에 일본은 귀찮은 존재였다. 그 행태의 역사적 결말까지도 닮아, 중화는 서양에 굴복하고 소중화는 ‘모조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에는 당시 유럽이 중국의 지식을 제 것으로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필사적인 ‘짝사랑’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따르느라 얼마나 애썼는지도 안다. 그것은 ‘원숭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처절한 노력이었다. 처지가 바뀌어서 그런가? 서구와 일본의 도서관을 염탐하며 나는 짝사랑하는 원숭이가 된다.



주간동아 2005.01.25 470호 (p66~68)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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