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2

2004.12.02

佛 낙태 허용 30년 ‘논쟁은 아직도’

각종 강연·토론회 등 봇물 ‘새로운 조명 시도’ … 현재까지 “반인륜적 행위” 반대 의견 많아

  • 파리=지동혁 통신원 jidh@hotmail.com

    입력2004-11-25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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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여성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합니다!”

    시몬 베이유 보건부 장관이 국회 연단에 올라 낙태 허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반론에 나선 의원들은 낙태 허용법안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발상이라며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새내기 여성 장관의 윤리적 자질을 의심하는 인신 공격이 쏟아져나왔다.

    새벽 3시가 넘도록 이어진 열띤 찬반논쟁 끝에 낙태 허용법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찬성 284표 대 반대 189표. 프랑스에서 낙태가 합법적인 행위로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974년 11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낙태를 거론하는 것조차 가톨릭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터부시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취임 초기였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여성권익 신장을 정책의 한 축으로 삼았고, 베이유 장관의 낙태 허용법안을 강력 지지했다. 하지만 자크 시라크 당시 총리가 법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우파 정부 내부에서조차 낙태 허용 문제는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법안은 오히려 좌파 의원들의 절대적 지지와 일부 여당 의원의 동조에 힘입어 가까스로 통과될 수 있었다.

    사회적 가치관에 변화 준 일대 사건 ‘평가’



    낙태 허용법안 제정 3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는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한 열띤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법안 제정에 결정적 구실을 함으로써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베이유 전 유럽의회 의장은 최근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록을 출간했다. 프랑스 언론들도 30년 전 중대한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현재에도 여전히 활발한 토론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의료계와 종교계, 여성단체 등 낙태와 직·간접적 관련이 있는 여러 분야에서도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렇듯 인공유산 허용문제가 여전히 프랑스 여론의 중심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다양한 시각을 함축하는, 심각하면서도 미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아제한 방법은 오래 전부터 인류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낙태는 전통사회에서 종교·윤리적 이유로 금지돼왔는데,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유난히 이른 시기에 인구 감소를 경험한 프랑스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출산장려 정책을 추진했다. 자연히 낙태는 금지됐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구정책은 주요 정치사안으로 떠올랐으며 이에 따라 1920년에 강화된 낙태금지법이 도입됐다. 낙태금지법은 낙태 행위뿐 아니라 이에 대한 방조, 심지어는 여성의 피임까지도 제한했다. 42년에는 법 개정을 통해 인공유산이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죄이며, 낙태 시술자는 사형에 이르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등장한 페미니즘 운동으로 여성들은 ‘출산의 자유’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어 60년대에는 가족계획의 장점이 홍보되기 시작했고, 피임과 낙태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에 이르렀다. 67년 영국이 서구에서 최초로 낙태를 허용하고 핀란드, 덴마크, 미국의 일부 주 등이 뒤이어 같은 결정을 내린 것도 프랑스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68년 5월 학생운동 이후 여권 신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낙태 허용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여론의 주목을 끈 두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낙태 허용 운동’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 71년 4월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 시몬 드 보부아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화배우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등 343명의 여류 저명인사들이 주간지 ‘누벨 옵제르바퇴르’에 낙태 허용에 대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것. 그들은 자신들의 낙태 경험을 시인하면서 피임과 낙태에 대한 적법한 권리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법을 어겼으니 처벌해달라’는 말로 항의 표시를 했으나 결국 검찰은 사법처리를 포기함으로써 실정법 집행에 허점이 있음을 자인한 셈이 됐다. 이듬해 낙태를 이유로 피소된 17세 여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그러나 여론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 여성은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았고, 낙태금지법의 실효성이 다시 한번 심판대에 올랐다.

    80년대 들어 낙태 반대운동 고개들어

    결국 법이 사회 현실의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 낙태허용법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임신 중절을 합법화한 첫째 목적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인공유산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입법 직전의 한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한 해 25만 건의 낙태가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 해 250여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조사됐다.

    낙태허용법 도입 당시만 하더라도 낙태를 전면 허용하지는 않았다. 베이유 법안은 인공 임신중절을 5년간 한시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의 시한이 종료된 79년에야 새로운 입법 절차를 밟아 최종적으로 낙태에 합법성이 부여됐으며, 82년부터 낙태 시술이 의료보험 혜택 범위 안에 놓이게 됐다.

    구체적으로 낙태허용법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해 인공유산을 인정했다. 여성이 임신으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경우, 임신 10주 이전에 정식 의료기관을 통해 시술될 경우에만 인정된 것. 낙태가 음성적으로 이뤄졌을 때 여성 건강에 미치는 위해 요인과 함께 이런 의료행위가 음지에서 이뤄지면서 발생하는 금전적 부당 요인을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결국 이 법은 낙태 행위 자체를 옹호하고 일반화하기보다 여성에게 법의 범위 안에서 생명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주고, 합법적으로 정신적·육체적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음성적인 낙태 시술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 법의 도입으로 모든 프랑스인들이 낙태에 대해 찬성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생명은 잉태된 순간부터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톨릭 교리를 내세우는 종교계와 의료 윤리를 앞세운 일부 의료진, 그리고 전통적 가치 수호를 주장하는 보수 시민단체 등에서는 법이 낙태라는 반인륜적 행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낙태 반대운동은 80년대 후반 약물 복용에 의한 낙태 시술법 도입을 계기로 활발해지기 시작해 현재에도 여러 민간 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반면 정부에서는 낙태 허용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보완 방안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즉 다양한 피임 방법 개발과 보급을 지원하고, 청소년 성교육을 강화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도록 돕고 있다. 일례로 2000년부터는 의사 처방전 없이도 약국에서 사후 응급 피임약을 살 수 있게 했고, 미성년자에게는 이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한편 2001년에는 기존 낙태 허용범위였던 임신 10주를 12주로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법을 마련하는 등 사회의 현실 변화를 수용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낙태 문제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상반된 의견을 좁히는 데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낙태허용법 제정 30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프랑스는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 특히 다수의 미혼 여성들이 홀로 떠안고 있던 낙태 문제를 공론화해 사회 전체가 고민하도록 이끌어냈다는 점에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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